씨(許氏) 제실(祭室)인 추원재(追遠齋)를 자주 찾던 때가 있었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온 이 선생을 알게 되면서 그가 살고 있는 추원재를 자주 들렀다. 추원재는 불을 때서 방을 한번 덥혀놓으면 그 온기가 며칠은 갔다. 또 여름에는 대청처럼 시원한 마루바닥에서 얘기 나누며 지내기가 좋았다. 봄에는 꽃이 피어 아름답고 가을에는 주변에 핀 들국화를 말려 꽃차도 마셨다.
  제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었고 참석한 후손들의 이용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 밑에 외따로 떨어진 제실에서 살겠다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서 비어 있는 곳이 많았다. 외지에서 온 귀농인들이 제실을 지키며 이곳에 딸린 논밭을 경작하면서 생활하였다.
  보안면을 지나다가 옛 생각이 나서 추원재를 찾으니 젊은 부부가 예쁜 딸아이와 살고 있었다. 안 주인은 저녁식사 준비에 바쁘고 바깥주인은 어린이 놀이방에서 아이를 데리고 오는 중이었다. 그곳에는 전에 보던 둔탁한 탁자가 마당에 그대로 있고 변한 것이 없었는데, 마당 구석에 놓였던 오래된 이쁜 석등이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거주자가 바뀌는 빈틈에 누군가가 몰래 가져갔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것은 조상의 숨결이 깃든 문화재로, 제사에 참석한 후손들이 어루만지기도 하며 오래토록 사랑해왔으니까. 
  추원재는 부안에 처음 들어온 태인허씨(泰仁許氏) 허사문(許斯文)을 모시고 제사하는 제실이고 묵방산 아래에 있다. 허사문은 조선 세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사헌부 지평이다. 부안군 출신은 아니었지만 벼슬을 버리고 본군으로 낙향하였기 때문에 태인허씨의 입향조(入鄕祖)가 된 셈이다. 그의 무덤은 보안면 월천리 묵방산에 그의 부인 개성박씨와 합장되어 있다. 이들은 원래 태인의 고을 이름인 시산(詩山)을 본관으로 사용하였으나 고을 이름이 태인으로 바뀌자 지금은 태인을 본관으로 쓰고 있다.
  부안지역 학교에서 연례행사로 이루어지는 봄가을 소풍의 장소는 제실이 있는 산으로 쉽게 정했다. 햇볕 쨍쨍한 날에 학교 인근으로 도시락 하나씩 들고 원족을 가던 때였다. 읍내에 있는 학생들은 부안김씨 제실이 있는 석동산으로 봄가을 소풍을 많이 갔다. 그때 앨범을 살펴보면 학생들의 사진 뒤로는 묘나 비석들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백산고등학교는 유씨제실이나 분지동에 있는 제실에 주로 갔다. 묘 앞에 펼쳐진 널따란 잔디에서 손뼉 치며 노래하고 제실의 우물도 찾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으니 소풍 장소로는 제격이었다.
  집이란 사람들의 온기와 손때가 묻어야 오래 간다는 말을 기억하며 올해는 추원재를 몇 차례 찾아보고 싶다. 태인허씨들이 이 곳에 제실을 마련하여 종중(宗中)이 함께 만나 결속을 다진 이유도 찾아보고, 조상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이들의 뜻도 함께 살피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추원재는 아름답고 친근하다. 석축을 쌓아올려 집을 앉혔으니 더욱 당당(堂堂)하게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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