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양민과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 4.3항쟁 등 좌우대립과 보도연맹으로 학살되었다.

해방의 벅찬 감격과 환호는 너무도 짧았다. 해방 일년도 못되어 우리 민족에게 비보가 들렸다. 그것은 1945년 12월에 모스코바의 삼상회의에서 결의된 한국에 대한 미·소·영·중의 4나라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안이었다. 여기에 전민족적인 반탁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격렬하게 반탁운동을 한 것은 임정세력이었지만 처음에는 모든 정파세력이 모두 다 입장을 같이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조선공산당이 김삼룡같은 이가 반대를 하였지만, 돌연 1946년 1월 2일에 찬탁으로 돌아서서 지지선언을 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일제하에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민심을 많이 장악했던 조공세력에게서 민심이 이반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임정세력은 반탁운동을 통해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통해 정권까지도 수립할 계획으로 강력히 임하였다. 이외에도 반탁운동에는 이승만과 한민당세력 및 과거의 친일파들이나 이북으로부터 공산체제를 반대하여 월남한 동포들도 모두 강력한 반탁과 반공세력이 되었다. 어찌 보면 조선공산당세력이 대중에게서 이반되는 최초의 정치적 계기와 사건이기도 했고, 여기에 좌우익의 도덕적 우위와 민족주의적인 자존감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도 가능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

신탁통치문제는 사실에 있어서는 감정의 문제만이 아닌 보다 더 근본적인 여러 가지를 깊게 헤아리며 판단해야할 문제이기는 했다. 왜냐하면 사실 신탁통치의 뿌리는 미국의 루즈벨트가 전후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면서 우리 조선민족문제를 일찍이 카이로나 얄타 등에서 거론하는 상황에서 최초에 무려 40년간의 신탁통치를 운위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만큼 미국에서는 비교적 진보적인 뉴딜 정책을 펼치던 루즈벨트도 조선문제에 대해서는 참으로 우리민족을 열등시하던 한민족에 대해서 참으로 무지했던 인물이었다. 도대체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활발히 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이승만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한심한 현실과 수준이었다. 이런 미국이 한국민족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이해도 없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해방 후에 온 것이었다. 미군정보다도 상부이던 동경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는 일본통치는 간접통치를 하고 조선통치는 직접통치를 하겠다고 언명했다. 그만큼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열등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군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사전정보는 일본총독부가 제공한 부정적이고 편파적인 우리 민족과 독립운동세력과 투쟁에 대한 폄하와 이간질이었다. 그리고 들어온 미군정은 이른바 영어를 하는 친미파들에 의한 통역정치를 하면서 구 친일파들과 관료집단이 포진하고 있는 한민당 세력을 파트너로 삼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미군정이 나름대로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측면에서라도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세력을 후원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미국의 세계전략차원에서의 그리스와 터키의 공산화의 위험에 직면하여 대소봉쇄전략을 취하게 되는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면서 미군정 또한 필연적으로 남한의 조공세력은 물론이고 좌우합작세력보다 친미 친일 한민당보수세력에 힘을 싣게 되었다. 이에 노회한 이승만은 이북에 있어서의 1946년 3월5일에 실행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실천적인 공산화정책을 지켜보면서 정치적인 승부수를 던진다. 그것이 바로 1946년 6월3일의 정읍발언을 통한 남한단독정부수립이었다.
1946년에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수차례 결렬되면서 한국문제처리에 있어서의 미국과 소련의 입장의 차이가 현격하고 이와 함께 남북에 있어서의 좌우대립과 이념갈등도 더욱 더 치열하게 심화되었다. 특히 북한에서 월남한 수많은 기독교세력을 포함한 유산계급의 남하와 함께 이들 중에 매우 극우적인 서북청년단을 포함한 세력이 구친일파집단과 한민당과 함께 이승만의 친위정치세력이 되었다. 원래 기독교는 이북이 해방직후에는 30만의 신자들이 있었고 남한에는 불과 10만의 기독교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 이북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다수의 기독교신자들이 남하하였고 이들은 무엇보다도 반공과 친미를 앞세우는 이승만의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반공과 친미국가로 만들고야 말았다. 그들은 일제하의 악명을 떨친 치안유지법을 본딴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전가의 보도처럼 정적과 세력들을 탄압하였다. 여기에 희생된 무수한 양민들과 진보인사들이 무려 30만이나 보도연맹이란 어용조직의 이름으로 동원되다가 마침내 다수가 학살당하고 사라져갔다. 심지어 신석정 시인이나 정지용 시인, 황순원 소설가들도 이 보도연맹에 들어가고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이들의 발호와 미군정의 구친일파집단-특히 경찰과 관료들이 온전히 구친일파들로 다시 채워지고 군림하는 것으로 인하여 민중들의 정치적 반감과 분노가 높아지고 여기에 일본세력이 남기고 간 막대한 적산불하와 해방 후의 부패의 만연과 이로 인한 민중생활의 도탄 속에서 대구에서의 10월폭동이 이루어지고 이어서 제주의 4.3 항쟁과 이를 진압하러가다가 반란군으로 돌아선 여순 순천사건이 줄지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은 무수한 양민이 포함된 이 사태를 진압하는데 있어서 무자비하게 공비로 몰아 학살극을 자행하였으며 여기에 군경의 하부부대로 동원된 것이 반공의 깃발을 앞세우며 잔인한 만행을 저지른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우리에게 감동을 준 최근의 영화 1987에 나오는 대공처장 박처원같은 자들이 바로 이 세력이었다.

이승만의 친위부대, 서북청년단.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추진이 북한의 공산화와 함께 민족의 영구분단의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한국민중들은 당연하게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좌우의 이념을 포용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는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에 기대를 걸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중간파 정치세력은 극우나 극좌의 양 정치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과 비판을 당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전후에 분단되었던 오스트리아의 통일처럼, 양 극단인 극좌·극우 노선이 아닌 자신의 민족주의적 입장과 통합과 신축성 있는 이념적 노선을 추구한 오스트리아는 중립적인 입장으로 그들의 분열을 방지하고 통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도 이성적으로는 그런 방향이 남북의 이념적 대치와 미소의 세계전략의 대립 속에서 우리의 분단을 막고 하나의 민족국가와 통일민족을 추구했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같은 좌우합작정치운동과 세력의 핵심이었던 몽양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에 암살되면서 이 운동도 강력한 지도력과 견인력을 상실하였다.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 대대적인 인민군 육성을 시작했다.

참으로 진보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적 입장과 함께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 및 기독교세력과도 통합적 정치세력을 이룰 수 있었던 탁월한 대중정치가 여운형이 분단적인 우리의 해방 후의 상황에서 암살로 제거되고 사라진 것은 민족적으로 너무도 아쉬운 비극적인 일이었다. 몽양에 이어서 백범 김구나 우사 김규식이 민족의 분단을 염려하며 노력하였으나 이들은 보수적인 정치적 한계와 대중정치적인 현실감각의 결여로 인하여 그들의 노력은 가상한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 교활하리만큼 노회한 정치적 책략가였던 이승만의 미국을 이용하고 심지어 친일파 이북의 서북청년단과 막강한 보수세력인 한민당을 동원한 정치력에 밀리면서 결국 남한 단독정부수립이 1848년 8월15일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남한에 이어서 북한도 1948년 9월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민족이 일천년간 이어온 단일민족의 동질성이 해방 후 3년 만에 두 개의 나라로 동강이 나서 분단이 되고야 말았다.

우익진영의 선봉역할 대공투쟁 빌미로 정치테러 자행.

중간좌파적 이념의 지도자로서 몽양 여운형이 민족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부단히 좌우합작을 시도하였다면, 지운 김철수는 정통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그가 평생에 걸쳐서 혁명과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소중한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와 연합전선을 소중하게 아끼고 생각했던 지도자였다. 또한 이같이 넉넉한 통합적 리더쉽과 관계로 살아온 김철수가 평생을 걸쳐서 추구했던 사회주의적 신념으로서의 실천적 조직인 공산당은 무엇보다도 당내민주주의와 동지들 간의 결속이 호호탕탕하고 투명한 작풍이어야만 했다. 김철수가 오랜 감옥생활을 통해서 엄정하게 박헌영의 존재와 지도력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에 조선공산당을 영도하면서 보인 박헌영과 콤크룹 중심의 종파 분파성에 분명한 한계를 감지한 김철수는 그를 포함한 혁혁한 일제하의 거물 공산주의혁명지도자들과 더불어 당대회를 공식적으로 열어 당의 지도력과 노선과 작풍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운동의 투쟁경력과 서열로서는 김철수는 박헌영보다 대선배였다. 김철수를 포함한 당내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 6인의 동지들은 참으로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하는 혁혁한 혁명가들이며 거물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헌영과 콤크룹 일파는 1946년 8월8일 이를 폭력적으로 무기정권과 중징계로 조치하였다.
이는 김철수의 비극이자 박헌영이 이끈 조공운동의 한계였다. 조선공산당-후에 남조선노동당으로 변신하는 조공이 일제하의 치열한 리더쉽의 장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색본의주의와 종파내지 분파적인 인사와 리더쉽으로 당을 편협하게 끌고가면서 당의 활성화에 커다란 한계를 노정하고 나아가 소중한 지도력과 인물들을 스스로 상실한 것이었다. 이는 좀 더 폭넓은 진보좌파 대중정당을 추구한 몽양 여운형의 사회노동당의 파탄과 암살로 이어진 참된 진보좌파의 비극과 한계를 불러온 편협성이었다. 소중한 것은 이렇게 해서 아쉽게 상실되었다.

부안의 동진면 당상리 출신으로 서울중동학교를 다니다 독서회사건으로 퇴학을 당하고 향리에 내려와 일제시대에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운동을 했던 최순환(1912-1950)은 1934년 6월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에 그는 향리의 문중재각에서 야학활동을 하며 농사를 지었다. 해방 후에는 교육활동에 헌신하여 당오초등하교 설립후원회장으로 활동하던 중에 부안의 1947년 3·22사태로 인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한 후에 6·25발발 후 7월에 개암골짜기에서 학살의 희생을 당하고 만다. 그는 부안 농민총파업으로 이어진 3·22사건 속에서 보도연맹에 가입된 상태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강제로 끌려가서 세칭 '사십꼬라지'당으로 부른 야산골짜기에서 불과 마흔 살의 젊은 나이로 학살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2010년 3월 1일 일제하 항일농민운동을 전개한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으며 복권이 되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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