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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민중사25-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회의를 주재하는 몽양 여운형 선생.

어둡고 괴로워라/ 밤도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다/ 동포야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건너/ 아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어둠아 물러가라. 현해탄 건너/ 눈물아 한숨아, 너희도 함께/ 동무야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저 멀리 시베리아 벌판 끝까지/ 아아 해방의, 해방의 깃발 날린다.
이 노래는 해방 직후에 방방곡곡 마을의 어린이들이 어울려 고무낭 놀이를 하면서도 함께 부르던 해방의 노래였다. 이 해방가는 그 후 대학가에서 독재에 대한 민주화투쟁을 벌리면서 대학생들이 소리높여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부르던 항쟁의 노래이기도 했다.

1945년 8.15해방은 우리 한민족의 만 35년간 모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노예에서 벗어나는 광복의 날이었다. 구한말의 무능, 부패한 이왕가와 친일세력이 우리 민족을 일본에 팔아먹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이 땅의 민중들이 비극을 당하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수많은 애국투사들과 선열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희생당하였던가.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빼앗긴 이래 우리의 민중사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참으로 하루도 휴식없이 민족독립과 해방을 위한 치열한 투쟁들이 이어져왔었지만, 불행히도 일제의 결정적인 패망은 우리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계제2차대전의 결과였다. 미국과 소련이 일본을 결정적으로 패배케 함으로써 졸지에 우리 한민족은 우리 국토의 남과 북에 미군과 쏘련군이 진주하는 현실에 처하게 된다. 일본은 전회에 우리가 살펴본바와 같이 일본자본주의의 팽창된 제국주의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전쟁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1937년에 중일전쟁에 이어서 1941년에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저들은 전쟁 초기에는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까지 점령하고 승리를 구가하였으나 결국에는 미국의 1945년 여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의 투하로 패색이 짙어지고 결정적으로는 1945년 8월9일 소련이 전쟁에 참여하여 만주방면으로 밀고 내려오자 일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8월 15일 천황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때문에 일본의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우리의 조국 강토의 남과 북에 진주하게 된 것이었다. 이같은 혼란과 비극은 그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민족의 현실과 과제가 되었고 이로써 우리 한민족의 감격의 해방은 너무도 짧고 바로 이어진 민족분단의 모순과 갈등과 혼란으로 민중은 어이없는 피를 흘리고 해방 3년 만에 남과 북에 다른 정권이 수립되면서 결과적으로는 해방 5년 만에 민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공이 선포되던 날 남한에 진주한 미점령군.

어쩌면 소박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우리 민족의 해방의 기쁨과 사건은 미국과 소련의 존재와 영향력없이 우리 민족끼리 우리 스스로의 뜻과 노력에 의하여 나라와 민족이 운영되었으면 가장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를 식민지 노예로 못살게 굴던 일본놈들을 몰아내고, 그 일제에 붙어 친일주구와 특권세력으로 살았던 친일파세력들을 온전히 발본색원하였더라면 우리 나라와 민족의 전도는 새롭게 진보하고 양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방의 감격을 더불어 기뻐하고 환호하면서 친일파를 뿌리 뽑고, 우리 민족전체에 정의와 평등의 나라를 꿈꾸며 가슴 부풀던 시간은 불과 짧은 1년 정도로 마감되고야 만다. 문제는 일본은 물러갔지만 그들에 빌붙어 민중과 민족에 대역, 배신의 삶을 살은 친일세력이 새롭게 미국에 의존하고 그들을 상전으로 삼으며 이 땅과 민중의 지배세력으로 다시 군림하는 어이없는 역사의 청산이 아닌 불행한 불의와 특권의 연속선의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의 이른바 해방공간과 그 후의 역사가 얼룩지고 혼란스럽고 모순과 비극으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반민족자들의 처단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해방 후 여운형의 건준에 의해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집회에서의 몽양 여운형.

일본의 패망직전까지 우리 민중의 기대를 모았던 것은 광복군을 투입하여 태평양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던 중경의 임시정부와 연안의 독립동맹 및 조선의용군과 국내에서 일본의 항복을 예상하며 몽양 여운형이 지하에 조직하였던 건국동맹이 있었다. 특히 그 중에 이미 1944년 8월, 해방 일 년 전에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결집한 중도우파와 온건좌파 인사들이 결집된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은 8.15해방 직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건국작업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건준은 우선 조선전체에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를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치안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건준은 미국이 남한에 진주하기 이전에 먼저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서둘러 1945년 9월6일에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인공에 좌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자 우파와 중도우파세력이 탈퇴하였다. 또한 바로 ‘인공’이 선포되던 날에 남한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은 하지중장을 사령관으로 하여 즉각 저들의 군정을 실시하면서 기왕의 ‘인공’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의 입맛에 맞는 친미적인 우익정부수립을 후원하기 위해 구친일파세력과 보수세력이 포진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관계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인공’의 존재도 또한 백범 김구가 주석인 중국의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고 때문에 백범의 귀국도 굳이 개인자격으로만 허용하여 김구와 임정요인들은 뒤늦게 11월 23일에 국내에 귀국하게 된다.

중국의 중경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도 암살된다.

해방직후 국내의 주요 정치세력과 지도자는 범중도좌파세력의 몽양 여운형과 미국에 망명해 있던 친미 보수적인 이승만과 중국임정의 중도우파적 김구와 중도좌파적 김규식과 일제하 오랜 치열한 공산당 활동을 벌린 좌파세력의 박헌영, 그리고 토착적이고 친일 보수세력인 송진우와 김성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민족 전체적으로 본다면 친일세력을 철저히 배제하고 이념적으로는 좌우연합을 지향하는 범중도파 진보정치세력이 많은 편이었고 지식인들의 호응도 높았던 상황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한민당 세력은 막상 서울을 중심으로 일군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전국적인 지방차원에서는 해방공간에서 절대적으로 보수와 친일파들이 해방 직후에는 제대로 발호하지 못하고 친일파청산과 민족의 자주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진보적이며 범좌파적인 정서와 조직이 아직 미군과 소련이 남과 북에 저들의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군정으로 돌입하기 전에는 대다수였다.

해방 후 최초의 인민사회장으로 치뤄진 몽양 여운형의 영결 인파.

민족내부의 모순은 이념적으로는 가장 전투적인 좌파로선을 추구하던 공산당과 가장 수구적이고 보수 및 친일세력을 대표하던 한민당이 가장 극단적이었으며, 이것을 통합하고 정리해낼 수 있는 중도좌파 및 중도우파적 정치세력으로서의 여운형의 근로인민당과 김구의 한독당의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국내에 정치세력과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은 초기에는 한민당과 제휴하면서 친미적인 그의 성향 그대로 철학과 이념은 약한 노회한 정치술을 발휘하였다. 그는 결정적으로 1946년 6월에 이른바 정읍발언으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하면서 큰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여운형이나 김구, 김규식 등은 남북의 분단이 아닌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벌리고 민족의 대동 통일을 추구하였다. 남한과 북한에 각각 두 개의 분단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7년 8월에 몽양 여운형은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백범 김구는 1949년 6월에 경교장에서 백주에 암살된다. 일제도 제거하지 못했던 통일과 남북화합을 주장하던 중도통합의 큰 정치적 인물들이 해방 후 동족의 손에 암살되어 사라진 것이었다. 그 암살의 교사는 이승만이며 극우보수세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남한에서 1948년 5월10일 총선거를 통하여 8월15일에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고, 북한에서도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민족의 좌우합작 통일운동은 결과적으로는 좌절 실패하고 유구한 한 민족은 이후 이념과 국토가 갈라진 분단국가와 전쟁으로 치달리게 된다.

부안이 낳은 걸출한 민족독립투사며 혁명가인 지운 김철수는 1948년 8월 17일에 무려 14년의 그의 옥고를 마감하고 공주감옥에서 석방된다. 그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인공의 간부로도 피택되고 원래는 공산당의 서열과 투쟁경력도 가장 수위에 속하였지만, 박헌영과 콤 크룹의 공산당 운영의 종파성에 반발하여 징계를 당하며 낙향하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김철수의 삼당합당의 상황에서의 조선공산당의 지도작풍과 당내비판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과 가치로 재음미되어야 한다고 보여 다시 한 번 언급될 수 있을 것 같다.

부안에서의 해방공간의 상황은 우선 부안건국준비위원회가 그 위원장에 1920년대 신간회의 총무로 활약했던, 신석정 시인의 형인 옥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던 인품과 명망이 높던 호민 신석갑이 취임하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을마다 치안대가 설치되어 해방직후에는 친일세력과 친일부역자를 색출하고 징치하였다. 조선공산당의 부안군 책임자는 일찍이 1920년대부터 항일농민조합활동을 벌이던 김철수의 동생인 김복수였고 그 산하 공산주의청년동맹 부안 책임자는 신석정의 소설을 쓰는 문우이자 신석정 시인의 ‘촛불’시집의 발문을 쓴 다정한 인간적인 벗이었던 금아 김태종이었다. 지운 김철수가 일제 때부터 뿌린 씨앗들로 전북내에서도 부안의 좌파 진보세력은 강한 편이었다.
전국적으로 일본군인과 일본인이 쫒겨간 후에 미국이 들어서고 부안에도 미군이 상서면에 진주하였다. 그러나 남한의 정국이 미군정 치하에서 친일파세력을 척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의 친일세력과 인물들이 이승만과 한민당과 미국에 붙어 온존되자 민중적 혐오와 불만과 저항이 매우 크게 되었다. 여기에 남로당의 새로운 대중전술이었던 시한부 총파업이 부안지역에는 의외로 관민항쟁으로 매우 증폭이 되어 1947년의 이른바 부안3.22사태가 발생하고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이시기를 계기로 부안의 진보세력이 궤멸되었고, 쫒기게 된 좌파세력이 부안변산일대에 빨치산으로 입산하게 된다. 이들 사태는 비단 부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저 유명한 1946년 대구의 시월폭동이나 수만의 제주민중이 살해된 1948년의 제주의 4.3항쟁이라는 사태, 또한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반란사건도 모두 친일 경찰이나 관료들이 해방 후에도 온존되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친일보수세력의 주도와 미국의 비호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책동을 반대하는데서 기인한 민중적인 거부와 항쟁이었다. 일제하에도 경험하지 못한 민족내부의 피 흘리는 끔찍한 비극이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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