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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민중사24-일제의 황국신민화와 조선민중의 빙하기의 삶과 세월
일군학병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와 김준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시인 이상화는 식민지 조국의 슬픈 봄을 노래하였다. 심훈은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간절히 민족해방과 독립의 비원을 절절히 노래하였다. 단순한 시인과 문인 이상의 독립과 혁명을 실천적 삶으로 싸우며 추구했던 “청포도”의 이육사 시인은 광야와 절정을 노래하였지만 끝내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을 보지 못하고 수십회의 투옥되는 고난 후에 차디찬 북경 감옥에서 옥사해야만 했다.

3.1운동 이후에 1920년대를 경과하면서 우리 조선민족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민족해방 민중혁명의 사회운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모질고 간악한 조선사회운동에의 금압과 사찰은 그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일제하의 사상운동은 모두 식민지 해방과 독립투쟁이었다. 때문에 치열한 휴식없는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조선사회운동의 투쟁과 노력이 면면히 점철되었지만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가혹한 사찰 속에서 온전히 그 노력을 꽃피우기가 너무도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같이 1930년대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중의 항일투쟁은 계속되고 노동자, 농민들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조직하며 강력한 항일투쟁을 벌다. 사회주의자들은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고 농촌, 공장, 광산으로 들어가 노동자와 농민들을 조직하는데 힘을 쏟았다. 조선공산당 운동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의거해서 끊임없이 이재유 박헌영의 콤크룹 형태로나마 지하투쟁으로 민중 속에서 치열하게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서울 남산에 차려진 조선신궁.

그러나 1929년에 발생한 세계 경제공황의 위기상황에서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저들 일본자본주의의 생래적 내부 위기와 모순으로 말미암아 만주, 중국, 태평양으로의 침략전쟁으로 치닫지 않으면 아니 되는 필연적인 단계에 접어든다. 그러면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이른바 상상을 초월한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일제의 단말마와 같은 극단적인 전시체제에서 조선민중의 생존권은 물론이고 언어와 정신과 모든 것을 철저히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깃발과 정책 속에서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소위 자치론자들과 친일군상들의 창씨개명과 조선의 청년과 처녀들을 일본의 총알받이와 징용 노예들과 위안부로 동원하여 만드는 광풍도 1930년대에 펼쳐지게 된다.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도 가까워진다는 말처럼 1930년대와 1945년 8월에 해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일견 현상적으로 일제의 폭력적 재비와 발악이 자심하였고 때문에 신념이 약한 이들은 모두들 독립과 해방의 희망의 가능성이 전혀 없고 보이지 않는 칠흑의 암야에 살아가는 형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를 망라한 전체 독립운동의 전선과 국면에서는 결코 암담한 현실만은 아니었다. 암야의 등불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조선독립과 해방의 불꽃들이 엄연히 살아있었고 그것은 소설 아리랑의 내용과 같이 중국대륙의 김두봉이 지휘한 연안독립동맹과 무정의 조선의용군으로, 광복군의 이름으로, 그리고 백두산 일대의 조선혁명군들이 일제에 의하여 러시아로 쫒겨갔을지라도 그 명맥이 끊이지 않고 유지되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외의 치열한 조선독립과 해방의 불길이 아직 세차게 타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상황은 사실상 극단적인 일제의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체제와 통치로 인한 민중적 신음과 도탄이 극에 달해 있었다. 상해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나와서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취임했던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조선중앙일보가 1937년 폐간된 이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1940년에 모두 다 폐간되고야 말았다.

중국 대륙침략을 위한 조선의 병참기지화정책과 병행하여 일제는 파쇼적 무력탄압을 강화하면서 우리 민족을 저들 일본의 이등국민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민족말살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일제는 기만적인 문화정책의 탈을 벗어버리고 노골적인 파쇼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리하여 저들은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종래의 조선에 진주하던 2개 사단의 일본병력을 3개사단으로 계속 늘려서 1941년에는 3만 5천 여명, 패전 말기에는 무려 약 23만의 병력이 주둔하였다. 경찰력도 증원되어 1941년에 3만 5천 여명의 숫자 이외에 비밀고등경찰, 헌병 스파이, 경찰 보조의 경방단등과 1938년에는 조선방공협회와 시국 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자와 항일인사들의 박멸에 나서며 철저한 사찰과 정보망으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검거, 투옥, 학살하였다.

조선 삼천리의 방방곡곡 경관이 수려한 곳마다에 일본의 신궁이 들어서며 신사참배가 이루어지고 일본 황실에 대한 궁성요배와 신사참배가 강요된다. 전국에 무려 1.141개의 신사가 세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우상숭배와 신사참배 문제가 현실화되고 신사참배에 반대한 성직자들이 감옥에 가거나 옥사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우리 민족의 언어와 글인 우리 말과 한글도 강력히 단속하는 바람에 우리의 글과 말을 지키던 조선어학회의 노력도 탄압되어 1942년 10월에 다수의 일꾼과 지도자들도 함흥경찰서에 검거되어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고 고문과 형무소 생활 속에서 한징, 이윤배등이 옥사하게 된다. 조선의 모든 학교와 관공서에서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며 일본어만 사용하게 하였으며 1939년에는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단행하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입학이나 공문서발급이 금지되고, 식량과 물자의 배급 등에서 제외되었으며 우편물도 전달되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국민의 20%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기개를 보이기도 하였다.

1939년에 조직된 이른바 문인협회도 대표적인 친일주구단체였다. 이 문인협회에 참여한 인사는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김동환, 최재서, 모윤숙 노천명 등이었다. 특히 자치론자이며 민족개조론을 떠들던 이광수는 첫째로 가야마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을 하고 철저히 조선의 일본화를 부르짖으며 친일주구로 날뛰는 모습을 보였다. 1938졎 8월에는 김성수, 윤치호, 최린, 김활란 등이 이사로, 백철, 유진오, 홍란파 등이 문화위원으로 참여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만들어 도에서 말단 리(里)에 이르기 까지 전국의 지방조직을 망라하고 그 밑에 10호 단위의 애국반이라는 것까지 두고 반상회를 통해서 총동원체제를 강화하였다. 일제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1938년부터 모든 조선인들에게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한다”라는 내용의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일본어로 외우게 하였고 일본천황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천황의 궁성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나아가 일본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근본적으로 말살하기 위하여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내선일체 및 일선동조론을 강조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를 통해서 약 20만명의 청년들과 학도병들을 저들의 전쟁에 징집하였고 무려 1백만명의 한국인을 저들의 징용대상으로 탄광, 비행장, 군수공장, 철도 등의 공사장에 노예처럼 강제수용하여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그 중에 평양의 미림비행장과 사할린과 유구로 끌려간 노동자들이 무려 7천명이 학살당하였다. 어린 학생들도 근로동원을 당하였고 근로보국대와 애국부인회에 여성들이 동원되다 못해서 전쟁 막바지인 1944년 9월에는 악명 높은 ‘여자정신대근무령’으로 무려 20만의 조선의 꽃다운 처녀들을 강제동원하여 전쟁의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과 지하투쟁과 고난의 삶으로 싸우고 민중들이 도탄에 신음하는 일제말기에 이 땅의 친일파들의 친일행각은 기승을 떨었다. 부안 출신의 대표적 거물 친일파는 김연수였다.

부안 줄포 출신으로 경성방직, 삼양사를 거느린 친일재벌로 활동한 수당 김연수.

호남을 뛰어넘은 조선 굴지의 재산가이자 인촌 김성수의 친동생이며 부안줄포 출신인 삼양사 재벌의 창업자인 수당 김연수(1896-1979)도 본격적인 친일행각에 돌입하게 된다. 그는 1925년부터 경성방직을 비롯해 삼양사, 해동은행 등을 경영했고 일제의 만주 침략 후에는 만주까지 사업을 확장해 1939년 남만방적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영했다. 김연수는 1939년 경성부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받았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경성방직으로 군수산업에 뛰어들었고, 1944년 전쟁 지원을 위한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조선총독부 산하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총독부 신문인 매일신보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친일공로로 조선총독부로터 네 차례나 포장을 받았다. 김연수는 광복 직후 반민특위로부터 친일파로 지목돼 조사를 받았으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 풀려났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09년 6월 김연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그의 전북 고창군 땅 1만여 제곱미터를 국가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어려운 식민과 훼절의 시대에도 의연하게 붓을 꺽으며 민족의 빙하와 촛불과 슬픈 목가를 노래한 신석정 시인.

조선 천지가 온통 황국신민화와 일제의 발악적 팟쇼 정책에 시달리며 친일파들이 극성을 떠는 상황에서 부안의 향리에서 가난과 외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시인 신석정(1907-1974)은 처절한 민중의 삶과 역사의 빙하기를 노래하였다. 많은 문인들이 친일집단에 이름을 걸어 활동하며 심지어 박한영 스님 문하의 불교중앙강원 동문으로 같이 수학한 친구이며 문우였던 서정주(1915-2000)는 일제 말기에 다쓰시로 시즈오(達成靜雄)로 창씨개명을 하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을 맡아 친일의 주구노릇을 자행하던 것이 일제말의 참담한 시대적 풍경이었다. 그러나 신석정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부안의 청구원에서 묵묵히 농사를 짓고 밤에는 시를 쓰며 어려운 시대를 바워냈다. 그의 일제말의 핍절한 가난과 힘든 생활 속에서도 붓을 꺾으면서도 창씨개명의 거부는 물론이고 결코 훼절의 무릎을 꿇지 않고 깊은 밤에 한그루 밝힌 “촛불”의 삶으로 “슬픈목가”를 홀로 부르며 암담한 고난의 세월을 의연히 바워냈다.

민족의 암야를 시집 촛불로 노래한 시인 신석정.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 신석정의 시, “어느 지류에 서서”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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