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 고향이 아님에도 부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까운 친구 가운데는 부안을 둘러보고서 지역에 와서 산다면 보안면의 우반동(愚磻洞, 우동마을) 일 것이라고 마음을 내비친 적이 있다. 개인으로도 지역의 역사문화를 얘기할 때, 반드시 거론할 곳 중의 하나가 우반동이라고 생각한다.

우반동을 높이 치는 사람들은 수려한 경치와 이곳에 살던 옛 사람을 들어 이야기 한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1569~1618)은 우반동 골짜기에 있는 정사암(靜思巖)에 잠시 머물렀고 우반동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우반동으로 들어가자 시냇물이 옥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덤불 속으로 쏟아진다. 시내를 따라 채 몇 리도 가지 않아서 곧 산으로 막혔던 시야기 툭 트이면서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날아오르는 듯 치솟아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동쪽 등성이에는 소나무와 회나무들이 울창하여 하늘을 가리었다.… 걸어서 시내를 따라가다 동쪽으로 늙은 당사나무를 지나 정사암에 이르렀다.-‘중수 정사암기’

우반동과 그 주변 경치가 빼어났다는 것은 조선 선조대에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시를 읽어도 알 수 있다. 그는 ‘우반십경’을 남겨 우반동 주변의 아름다움을 열 가지로 표현했다. 아름다운 경치 중에는, 검모포 수군의 저물녘 호각소리, 선계폭포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 배고개의 울창한 소나무 숲 등이 있다. 그러나 우반동의 풍경은 크게 변했다. 첫째는 마을 뒷산의 산허리를 잘라내어 도로를 내면서 산의 경치가 많이 훼손됐다. 둘째는 우동제를 조성하면서 계곡의 기암괴석이 물속에 잠겼다. 마지막은 마을을 흐르던 장천(長川)도 잘려서 우동제 속에 묻혔다. 이런 변화에 따라 아름다웠던 경치는 옛 문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우반동이 번창한 마을로 바뀐 것은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부터일 것이다. 그 뒤 유씨로부터 김홍원이 토지를 사고 손자 김번이 우반동에 들어오면서 부안김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정월 초닷새부터 준비하여 지내는 마을 굿 우동리 당산제는 많은 외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중요한 민속 행사가 되었다.

언젠 부턴가 우동 마을에서 공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봤다.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이다. 이 사업은 기초생활기반 확충을 비롯해 지역소득증대, 지역경관개선, 지역역량강화사업 등으로 진행된다. … 실례로 지난 2009년도에 가장 먼저 사업이 완료된 우동권역은 체험관광객 유치를 통한 소득증대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 (부안군청홈피, 언론보도 참조)

2010년대에도 우동 마을에 담장 사업 등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옛 담장을 없애고 작은 돌들을 시멘트로 붙여 담장을 만들고 그 위에 꽃 같은 것을 심는다. 그런데 담의 형태나 높이 등이 특색 없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오래된 마을의 옛 향취와 다양함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누가 봐도 돈을 들여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고개를 갸웃 할만하다. 70년대에 브로크 벽돌 담장을 만들던 새마을 사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다.

부안지역 몇 개 면에서는 현재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혹시나 예산을 어떻게 쓸지 찾지 못해 개발사업자들에게 휘둘리거나 삶터가 획일화되고 파괴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지속 가능하고 후손들이 살만한 삶터를 위해서 10, 50, 100년을 내다보는 온기 있는 변화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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