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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민중사21-3.1운동 이후 한국사회주의운동과 조선공산당의 창당 및 전개
지운 김철수 선생 유묵

3.1운동은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거족적이고 전민중적인 항일봉기였으나 3.1운동은 비폭력운동의 한계와 지도부인 민족부르주와지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지도력과 전략과 실천능력의 함량부족이라는 한계로 인한 민중의 막대한 희생 속에서 비참하게 좌절되었다. 이 참담한 결과와 반성 앞에서 보다 사상적이고 전투적인 항일독립운동의 필연적인 전략과 토대의 시대적 역사적 요청 앞에서 러시아 혁명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조선 천지에 새로운 사회주의 깃발과 열풍이 도래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혁명에서도 동일하였다. 중국에서도 한국의 3.1운동에 큰 자극과 영향을 받아 역사적인 5.4운동이 일어났지만 결국 5.4운동 이후에 1921년에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되고 중국혁명은 초기에 손문의 영도하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그런데 의미있는 것은 지운 김철수의 동경 유학시절에 결성했던 신아동맹단과 이동휘의 권고가 북경대학 교수이며 초대 중국공산당 당수이던 진독수의 중국공산당 창당과 혁명운동에 직, 간접적인 추동을 한 것이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 김재봉 책임비서

1920년 4월1일 조선노동공제회가 최초의 노동자 단체를 결성하여 전국에 20여 개의 지회를 갖추고 1만 5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기관지 <공제>를 발간하였다. 이 단체는 1922년 10월에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노동자해방을 전면에 내세우며 조선노동연맹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의 노동단체들은 1920년부터 전 세계 노동자들의 명절인 메이데이 기념행사로 동맹파업과 시위행진 등을 가지기도 했다. 이 흐름 속에서 서울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1924년 4월에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전체를 통합하여 전국 조직으로 조선노농총연맹이 결성되어 “노농계급의 해방과 신사회의 실현”의 목표와 농민들의 “소작료는 3할 이내로 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실제로 3.1운동 직후인 1920년의 조선민중의 대다수는 농민대중이었지만, 이미 조선의 공장노동자는 5만 5297명이었고 그 숫자가 1928년에는 9만 9547명으로 증가하고 여기에 광산, 철도, 운수, 해운 부문 노동자의 숫자를 합치면 1920년대 후반의 노동자의 숫자는 약 100만명에 달하기도 했다.

조선의 노동문제, 농민문제의 사회주의적 운동과 조직만이 아닌 여성, 청년운동도 크게 강화되었다. 1924년 5월 23일 조선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로 정종명, 주세죽, 허정숙, 정칠성등에 의하여 조선여성동우회가 결성되고 봉건적인 조선사회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조선여성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이 단체는 1927년에 해체되어 새롭게 근우회가 만들어질 때까지 전국적으로 40여개의 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순회강연과 토론, 강좌 등을 통하여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사회주의 청년회의 조직운동도 활발해져서 기왕의 서울청년회 이외에 칼 맑스의 생일을 딴 화요회가 신사상연구회에서 발전적으로 1924년 11월 19일에 개편 조직되었다. 이 화요회에는 홍명희, 홍증식, 김찬, 윤덕병 등이 주요인물로서 당시 회원이 60여 명이었다. 북풍회는 1924년 11월 25일 동경에 있었던 유학생 중심으로 사상단체인 북성회의 국내본부로 조직되었고 서울청년회와는 대립하면서, 화요회와는 협력관계였다. 결과적으로 북풍회와 화요회의 결합 속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이동휘와 김철수의 추동으로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이 이루어진 상해의 박애여학교

각종 신문 잡지등의 출판도 사회주의 열풍이 불었다. 1922년 3월에 한국최초의 사회주의 잡지인 <신생활>이 조선민중 속에 “신생활을 제창함, 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함, 자유사상을 고취함”이라는 구호를 내 걸었는데, 이 잡지는 레닌의 혁명자금이 김철수를 통해 전달되어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사회주의의 보급에 주력하였다. 이 잡지는 1922년 11월호와 12월호를 러시아혁명 기념 특집으로 기획하자 일제는 적화사상을 선전했다는 이유로 관계자들을 구속한 후 1923년 1월 폐간과 함께 인쇄기를 몰수하였다.

이 외에도 천도교의 <개벽>지와 <동아일보>는 레닌 사망이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정치적 상황을 다룬 다수의 기사를 게재했다. 세간에 사회주의 신문으로 까지 불리운 <조선일보> 또한 강력한 이념적 논조로 1924년 6월 18일자 사설에서 이광수 등의 자치론자들을 강력히 매도하고 그들을 “구더기”로 비유하며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이 신문은 1925년 3월14일자 사설에서 칼 맑스 42주기를 맞아 극진한 그의 사상과 생애에 대한 찬사를 실었으며 1933년까지 강력한 사회주의 논조의 신문으로서의 기조를 견지하고 유지하였다. 당시 조선일보 사장은 한국사회의 원로인 월남 이상재였고 그의 넓은 도량과 기백과 화요회의 간부이며 조공당원이었던 홍증식이 영업국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일보의 지국장과 중앙의 기자들과 지방기자들은 공산당의 간부들이어거나 적색사상을 포지한 지식인들이었다.

드디어 1925년 4월 17일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상황 속에서, 비밀리에 서울 시내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이 “조선은 조선인의 조선이다”라는 선언과 슬로건으로 창당되었다. 조직적으로는 조선공산당은 서울청년회 계열을 제외한 국내외의 모든 공산주의 그룹들이 연합한 형태를 취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화요회가 당조직을 주도하였다. 초대 당의 책임비서는 안동 출신의 김재봉이었다. 안동은 원래 유학이 강한 보수적인 지방이었으나 권오설 등 강력한 공산당 간부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조선공산당의 창당 당시에 조선에서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 등은 ‘일본 경찰의 감독과 감시 아래’ 합법적으로 최소한의 공개 활동이 가능하였으나 공산주의 단체의 조직과 활동은 소위 일제통치와 국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위반하는 철저히 금압된 중대한 불법운동으로 다루어졌다. 이런 한계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창당은 일제의 눈을 따돌리기 위하여 동대문 밖의 전조선기자대회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일부러 준비하면서 비밀리에 중국음식점에서 개최한 것이었다. 아울러서 창당 다음날인 4월 18일 서울 훈정동에서 조선공산당 산하의 청년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가 일찍이 1921년 상해에서 조직된 이르쿠츠크계 고려공산청년회의 박헌영과 김단야, 임원근과 화요회의 김찬, 조봉암등의 주도로 20여 명이 모여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청년총동맹이라는 합법적 단체를 표방하면서 지하에서 활동하였다. 1차 조선공산당은 수차례 집행위원회를 열어 기관지 발행, 만주총국 설립, 고려공청 지원, 노농총동맹 분립 등을 논의했다. 고려공청은 조선청년총동맹에 들어가 27개의 군 동맹과 9개의 도단위의 연맹을 조직하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21명의 학생을 파견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트로이카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일제는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 일제 통치에 대한 가장 두려운 적대세력으로 인식하여 강력한 탄압으로 임하고 법적으로나 사찰로 혹독하게 대처하며 발본색원하려 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1925년 5월 일본 본국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치안유지법을 실시한다고 공포했다. 치안유지법 제1조는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다든가 또는 그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라고 규정했다. 이는 일본과 조선의 공산주의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한 법령이었으며 이것은 해방 후에도 남한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연결되었다.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은 대부분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 위반의 사상범으로 사찰대상이 되고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그런 가운데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 고려공청 회원의 부주의한 경찰 폭행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에서 모스코바의 세계혁명의 지도부인 코민테른에 보내는 문서가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의 실체와 조직이 드러나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었다. 그 결과 당 책임비서 김재봉,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 등 모두 220명이 체포, 검거되어 일망타진되었다. 이 가운데 치안유지법과 정치범처벌령, 출판법 위반 등으로 101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83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2명은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백산고교의 거대한 지운 김철수 선생 추모비

제1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인 김재봉과 핵심간부인 김찬, 주종건 등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일제에 검거되기 전에 후계당 조직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925년 12월 말부터 1926년 1월 초 사이에 진주에서 신문사 지국장을 하던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이준태, 이봉수, 김철수, 홍남표, 권오설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하는 제2차 조선공산당이 구성되었다. 2차 조선공산당은 검거 사태로 마비된 당의 조직적 기반을 확대하고 일제에 타협적인 자치운동의 전개를 막기 위해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들은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의 한 형태로 국민당을 조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2차당이 조직한 6·10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의 가장 성공적인 대중투쟁이었다. 순종이 승하한 뒤의 상황 속에서 6·10만세운동은 전국적 규모의 대중시위를 준비되었는데 조선공산당은 계급적인 요구를 드러내는 것은 극도로 자제하면서 임하였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이 준비 단계에서 발각되어 2차당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붕괴되었다. 당 책임비서 강달영을 비롯해 총 100여 명의 관련자가 체포되었다.

말년의 손수 지은 김철수 선생의 은거지 이안실

그러나 이어서 1926년 9월경 제3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고 제2차 조선공산당의 조직담당의 중책을 감당하던 중앙위원이던 부안출신의 김철수(1893-1986)가 새로운 당책임비서-당수로 임명되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중에 김철수는 일찍이 당의 조직책임자로 참여하였으며 사실상 일제에 의해 당이 검속되거나 파괴될 때에 제 3차 조선공산당조직을 책임질 사명과 임무까지도 부여받았던 것이었다. 김철수는 이미 1912년 동경의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는 1916년에 아시아의 혁명가들을 모아 신아동맹단을 결성하고 국내와 중국에서 이미 사회혁명당과 고려공산당의 조직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상해임정을 개조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던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다음호에 우리 부안이 낳은 걸출한 민족독립투사 및 사회주의혁명가 지운 김철수에 대해 부안민중사의 시각에서 상세하게 다루어보기로 한다.

글/최자웅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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