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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민중사19-삼일운동 후, 1920년대 민족 민중운동의 새로운 이념적 변화
상해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외교로선과 혁명로선으로 대립된 성재 이동휘.

1919년의 삼일운동은 큰 자극과 영향을 미친 중국혁명의 오사운동과 여러가지로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우리와 중국에게도 일찍이 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국의 난은 삼일운동과 오사운동의 역사적인 전사(前史)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삼일운동과 오사운동은 각각 공히 그 이후의 양국의 민족운동과 민중운동에 있어서 너무도 중대한 역사발전과 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빚어지게 된다. 삼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세계사적인 사건이 두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1917년의 레닌에 의한 러시아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제1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이었다. 이것은 조선과 같은 당시의 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식민지가 된 많은 피압박민족들에게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미친 두개의 축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미국이라는 다른 이념과 체제를 배경으로 한 세계사적인 흐름은 이후 수많은 민족독립운동과 민중운동에 있어서, 필연적인 좌우의 이념의 대결 및 보수와 진보라는 현격한 사상과 노선의 갈등 내지 대립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른바 삼일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종교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비폭력로선을 추구하며 독립을 기대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일제는 평화로운 조선민중의 만세운동과 독립운동의 의지를 야만적으로 분쇄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 달걀로 바위치기와 같은 무모한 비폭력노선과 근거 없는 민족자결주의에의 낙관으로 인해서 조선민중이 어이없는 처절한 죽음과 피해와 좌절을 경험한 것이었다. 이같은 민족부르주와 계급의 한계를 명확하게 경험한 민중들은 이제 새로운 독립운동과 민중운동의 활로를 보다 전투적인 전략과 이념을 통해서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레닌에 의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였다. 러시아 혁명은 구 러시아의 고질적인 비극과 모순이었던 짜르의 전제정치와 농노제도 및 모든 앙시앙 레짐에의 폐기와 청산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을 비롯한 세계의 식민지 피압박 민족들이 그들이 민족해방과 혁명의 모델로 새로운 사회주의 이념과 공산주의의 사회의 도래를 목표로 변화하게 된 것이었다.

임정의 초대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 선생.

조선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을 추구했던 이는 일찍이 대한제국의 구 군대의 참령 출신이었던 성재(誠齋) 이동휘였다. 이동휘의 일생은 근대 조선의 독립을 강렬하게 꿈꾸며 추구하였던 민족주의지도자가 어떻게 변신할 수 있고 어떻게 자신의 성숙과 발전을 이루어갔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삶이기도 하다. 이동휘의 일생은 몽양 여운형의 독립을 위한 삶의 궤적과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며 많은 독립운동투사들의 변화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과 중앙의 카이젤 수염의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

이동휘(1872,고종9~1935)는 함경도 단천 출신이었다. 그는 매우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타고난 의기와 강단으로 일생을 열혈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로 일생을 살았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을 아전으로라도 출세시키고자 했던 부친은 어린 이동휘를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通引)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나 통인 시절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는 것을 본 이동휘는 대담하게도 동헌으로 뛰어들어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었다. 사건 직후 이동휘는 서울로 도피하여 구한말의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참위에 임관되었다. 그의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고종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된 후 지방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동휘는 승진을 거듭하며 국방요충지인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군인들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부형과 같이 애모할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이동휘는 1905년 3월 군직을 사임하고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얼마 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민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문화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우리 조선이 독립이 되려면 ‘삼천리 방방곡곡 마을마다 학교 하나, 교회당 하나’가 세워지면 이루어진다는 강연과 신념으로 열열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다. 이동휘는 서북학회와 비밀결사 신민회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이후에는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전도사로서 함경도 일대에서 기독교 전도활동도 하였다. 한일합병을 앞둔 1910년 8월 초에는 일제에 또 한 번 예비검속 되었다가 한일합병 선언 후에 석방되었으며, 1911년 3월 다시 안명근양기탁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체포된 선생은 인천 앞바다의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보내야 했다.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된 이동휘는 1913년 2월경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하였다.

이동휘 선생의 조선독립의 열망을 담은 어록.

이동휘는 북간도에서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墾民會)를 지도하는 한편,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신교육 보급과 기독교전도활동을 계속하면서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그는 1915년경에는 노령으로 망명하였고, 1917년 러시아의 10월혁명 이후 이동휘는 레닌의 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18년 5월 13일, 하바로브스크에서 유동열, 김립등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1919년 8월 말경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민족 진영 인사들까지도 규합하였다. 그는 1920년 봄 공산주의자 그룹을 조직하여 1921년 종래의 한인사회당을 보다 발전 형태로 고려공산당으로 개편하고 개칭하였다. 상해의 고려공산당은 박진순과 함께 이동휘를 모스크바 파견대표로 선정하였다. 1921년 6월 19일 상해를 떠난 이동휘는 인도양, 수에즈운하, 지중해, 알프스 산맥, 독일을 거쳐 4개월 만인 10월 말 레닌그라드에 도착하여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면담하고 레닌으로부터 조선혁명을 위한 기금 2백만 루블을 받았으나, 돌아와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던 중에 레닌의 후원자금이 고려공산당 조직 기금으로 유용된 건으로 결과적으로 사임하였다.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국내에서 창당된 조선공산당을 간접적으로 후원하였다. 1926년 이동휘는 서울, 상해파의 대표로 6차 코민테른대회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동휘는 말년에는 연해주지역의 모플(MOPR; 국제혁명가후원회)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모플의 목적은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과 선전활동에 있었다. 이동휘는 모플 활동을 위해 스찬 지방을 방문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던 도중, 강한 눈보라를 만나 심한 독감에 걸려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해방을 그리며 1935년 1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인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하였고, 그는 1917년의 레닌의 러시아사회주의 혁명에 큰 자극을 받아, 오직 반일독립 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며 근본적으로 민족해방을 우위에 놓은 민족주의적 혁명운동가라고 할 수 있었다. 성재 이동휘는 1995년 뒤늦게사 가장 큰 상인 대한민국 건국장에 서훈되었다.

이같은 삼일운동 이후에 전개되고 발전된 민족운동의 추이와 함께 민중들도 변화되었다. 삼일운동 후에 일제의 조선 농민의 수탈은 매우 심각하였다. 특히 전북의 소작쟁의 건수는 전국적으로 전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발생한 지역이었다. 1920년대 농민운동의 주요한 부분인 전북의 소작쟁의는 항일농민투쟁으로, 특히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과 결부되어 치열한 항일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전북지역 일본인 대농장들은 거의가 1907년 이후 토지약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특히 대표적인 웅본농장은 일찍이 1904년부터 전북의 토지약탈을 시작하여 1907년에는 이미 1920년대에 소유하고 있던 면적을 이미 확보하였으며, 그 규모는 일제의 조선수탈의 대명사인 동양척식회사에 버금가는 토지소유규모였다. 당시에는 토지등기법도 없었고 군수의 증명도 필요 없었고 토지대장이나 지적도등도 없었기 때문에 웅본농장은 일제의 힘을 업고 쉽게 조선 특히 호남과 전북의 토지를 침탈할 수 있었으며 1908년에 화호리에 농장사무소를 두고 대단위 약탈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맞서서 1920년대, 거의 전시기에 걸쳐서 동척이나 웅본농장등 일본인 대지주들에 대한 조선농민 소작인들의 투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 12월에 화호노농친목회가 김복수 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일제와 일본대지주들의 수탈에 맞서 싸운 1920년대 농민들의 항일 소작운동-암태도 소작 풍경.

특히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소작동우회가 1925년 9월 7일에 조직되어 '청년운동과 노농운동에 노력할 것'과 '악덕지주 명부를 비치할 것'과 '소작문제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심각한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에 발생한 소작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악덕지주 성토'를 구호로 쟁의를 위한 소작인들을 조직하고 소작료 인하운동을 후원하거나 지도하였다.부안군 원천리와 정읍군 화호리와 백산노농친목회와 함께 1926년 3월 10일에는 이 지역의 삼각노농연맹을 결성하여 서로의 깊은 연대를 이루며 활동하였다. 이곳의 농민들은 일제와 일본인들을 경멸하였으며 공고한 민족의식으로 항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농민들의 항일의식의 형성에는 이 지역 일본 동경유학 출신 청년지식인들의 계몽활동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특히 부안군 원천리는 일제가 소위 '공산주의자의 소굴'이라고 일컫을 정도로 많은 이지역의 농민들이 항일 좌익사상에 공명하였기 때문에 일제는 감히 이곳에서는 내선일체나 내선융화 구호나 권유 따위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인독립운동가 추모비.

글/최자웅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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