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혈서로 쓴 '대한독립'.

조선은 끝내 1910년에 일제에 의한 경술국치로 우리 민족이 노예화 식민지가 된다. 그 전에 항일의병투쟁에 있어서 마지막 전면적인 항일전 제 3기 봉기가 정미년 1907년에 일어났다.

원래 초기 항일의병운동은 대체로 양반, 유림 등이 지도자들이고 그 전투병력의 주축과 다수는 농민들, 동학농민혁명의 잔당들과 영학당, 화적, 활빈당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다 전투적인 의병전쟁은 정미년 1907년의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에 발생하였다. 정미 7조약에 따른 구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군인들의 합류로 의병의 조직과 화력이 강화되어 의병전쟁형태로 발전하여 일군과의 전면적인 대일항전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한국군대의 해산에 분노하여 구 군대 시위대의 참령-오늘의 소령-인 박승환의 자결 후 시가전을 벌린 시위대와 각 지방 진위대의 해산군인들의 합류로 우수한 지휘관과 새로운 무기가 공급되어 의병의 전술과 화력이 강화되었다. 해산군대 중 민긍호의 원주 진위대와 지홍윤의 강화 분견대 투쟁이 치열하였고 대한제국의 기간부대였던 서울 시위대와 지방 진위대의 군인들은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대와 시가전을 벌린 후에  무기가 떨어지자 지방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싸웠다.

포악 잔인했던 일본군의 항일의병 토벌과 처형

정미 항일의병의 투쟁에 있어서는 특별히 과거의 전통적인 사대부 출신의 의병활동과 구분되는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의 출현이 더욱 의미가 있는바 홍범도, 차도선, 채응언, 안규홍,  김수민, 연기우 등이 대표적인 평민출신 의병장들이었다. 이중에서도 함경도의 국경지대에서 맹활약을 벌린 홍범도와 평안도의 채응언의 의병부대의 출현이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홍범도는 머슴, 광산노동자, 산포수를 전전하던 전력으로 특별히 산포수들을 모아서 항일의병을 구성하고 삼수, 갑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37회의 전투를 벌리고 친일파들을 응징하는데 커다란 활약을 하였다. 홍범도 부대는 기동력과 전투력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일본군들을 괴롭혔다. 평안도 지방의 구 한국군 부교출신 채응언 부대의 출현도 매우 전투적이었다. 과거의 양반과 유림 지휘하의 의병운동은 반일, 반개화, 근왕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새롭게 출현한 평민 지휘하의 의병운동은 더욱 전투적이며 반일, 독립전쟁적 성격을 띠었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전해산, 심남일, 임창모, 강무경 등 다수의 의병부대가 일어나 크게 활약하였다. 의병활동은 거의 전국적으로 망라되어 의병이 일어나지 않는 군이 없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항일의병의 범국민적 전국적 투쟁에 당황한 일본은 1개사단 이상의 보병과 1개 연대 이상의 기병과 헌병 6천여명의 병력을 투입, 새로 신설된 철도망과 도로망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기동성을 최대로 발휘하면서 의병투쟁의 진압에 혈안이 되었다. 항일의병은 빈약한 화승총, 활, 칼, 곤봉 등과 같은 낡은 무기들로 막강한 기관총과 소총의 무기와 화력을 갖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지만 드높은 사기와 전투력만으로는 막강한 일본군을 제압할 수는 없고 결과적으로는 패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들을 괴롭히고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홍범도 장군의 장백산 항일무장투쟁 기록화.

정미년 1907년에서 한일합방의 해인 1910년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전투에 참가한 의병은 무려 15만명에 이르고 의병과 일본군과의 교전 회수는 무려 2,500여회에 달하였다. 교전에 동원된 항일의병수는 8만2,767명었고 그들의 희생 규모는 전사자만 무려 1만 7.600여명, 부상자만 3만6천명에 달하였다. 1908년 한해의 일본군과의 교전회수는 1,976 회였다. 이 같은 항일의병의 전투와 출현에 일본군은 의병을 탄압하는데 잔인하고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가장 활발하고 전투적이었던 전라도 지방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이른바 그들은 1909년 9월에서 10월에 이르는 ‘남한항일의병대토벌작전’ 계획 하에 이른바 교반작전(攪拌作戰)을 써서 의병들이 근거지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촌락과 가옥을 방화와 약탈과 폭행으로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자행하였다. 항일의병을 국내에서 온전히 진압하고 이루어진 한일합방의 국권강탈은 이처럼 일제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무력행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치열한 의병투쟁 끝에 1914년 체포된 의병장 채응언.

정미항일의병은 1908년을 고비로 점차 약화되었으나 이때를 전후하여 장기항전에 대비한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910년 한일합방 후,  항일의병의 활동과 무대는 국내보다도 해외로 옮겨지고 전투적인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보다 장기적이며 꾸준한 항일투쟁으로 나아갔다.  특히 중부이북의 의병들은 장기적인 근거지를 찾아 간도와 북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보다 근본적인 힘과 투쟁의 무대와 기지를 건설하였고, 남부지역의 의병들은 지리산과 변산 등 해안 도서지역을 주목하였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1908년 8월 홍범도, 이범윤 등은 연해주 의병을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국내에서는 마지막으로 격렬했던 1915년 의병장 채응언의 체포에 이은 옥중 순국과 1914년 독립의군부에 대한 검거사건을 고비로 국내의병의 조직적인 활동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폭도 거괴(수)로 지칭된 채응언 의병장의 체포 신문보도.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이 노예화된 이후에 국내에서 해외로 옮겨간 대표적 의병부대는  만주의 통화, 집안의 류인석 부대, 장백, 임강의 이진룡 부대, 환인의 조채준 부대, 위명을 떨친 장벽현의 홍범도 부대 등으로 치열한 무장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이 같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과 운동 속에서 1909년 10월 26일 아침, 안중근에 의한 한국침략의 원흉 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할빈 역두에서의 처단은 획기적이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백범 김구와 같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투철한 항일의식으로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계급과 신분으로 이토를 사살하고 체포되어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불과 31세의 짧은 나이로 1910년 3월 6일에 순국했다. 안중근의 의거를 전후하여 1908년 3월 전명운, 장인환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활동한 미국인 스티븐슨을 사살하였으며 1909년 12월 이재명이 한일병합의 원흉이자 매국노인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만주와 노령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벌인 홍범도 부대원.

이러한 항일투쟁에서 부안과 변산 일대도 의병활동이 잦았으며 부안출신으로 의병활동을 벌리다 전사, 옥사로 순국하고 장기투옥을 한 대표적 인물들의 장렬한 투쟁은 다음과 같다.
고융건: 정대홍 의진에 참여, 고부 부안 흥덕에서 활동, 1909,4.피체. 7월14. 피살 순국/ 김공삼: 1907. 의병장 기삼연부대 중군장으로 고창주재소 습격 교전, 11월 추월산 일군수비대와 교전, 기삼연 피체 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20-200명의 의병지휘 1908. 2월 장성 송치산에서 일군 4명 사살, 3월 장성 월반장터에서 일인순사 3명 한인순사 3명 살해, 5월 무장에서 일군기병 7명 사살, 1909년 2월 변산에서 일군기병과 교전, 9월 피체 1910년 1.27 대구에서 교수형으로 순국/ 김낙선(樂先) : 1909년 이용선 부대 선봉장으로 30 의병으로 왜군과 교전, 3월 태인 남촌면 일군기병대와 교전 허벅지총상, 7월 12명 의병 선봉장으로 부안,고부,태인,정읍, 김제에서 유격전, 1909.8 김제군 홍산 내리에서 일군헌병대와 교전중 총상으로 체포,11월 7년형 복역 중 1925년 12.26 총상과 고문 후유증으로 44세로 서거/ 김영진: 부안군 의병장으로 서응오 김내서등과 1908.10 의병60명으로 부안군 여러 촌락에서 의병활동 중에 전사/ 진상구: 이성화 의진 참가 의병활동 1909.10 징역7년 복역 중 옥중에서 순국/ 최종현: 부안 봉덕리에서 의병12명과 총검으로 모금 및 의병활동 중 1909.3 체포 징역 10년 복역.

국경지대 항일의병 토벌을 위한 함북 종성 일본군 헌병대와 일제 경찰.

매우 비통한 것은 동학농민혁명의 반제, 반일투쟁과 한일합병 전의 항일의병투쟁의 힘이 하나로 집중적으로 결합되어 일제의 노예가 되는 길이 아닌 독립주권국가와 민중의 나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초기 항일의병은 반개혁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달라졌다. 이제 조국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은 새로운 주인공들과 민중 세력에 의하여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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