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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민중사12-갑오동학농민혁명의 쓰라린 에필로그와 부안의 남은 이야기들

동학혁명을 서사시 <금강>으로 쓴 민족시인 신동엽은 “동학년 곰나루의 아우성만 남고 모든 껍데기는 가라!” 라고 노래하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은 근대 역사에서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인도의 세포이의 반란과 더불어 그 어깨를 나란히 하는 획기적인 아시아 민중들의 3대 봉기로 평가되는 가히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약 1100만의 조선 인구에서 위대한 300만 민중들의 활화산과 봉기였던 동학농민혁명이 약 30만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패배하고 좌절되면서 조선은 급속히 일본의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비단 전라도와 충청도와 경상도의 삼남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천지가 수백만 인민들이 격동되고 들불로 타올랐다. 삼남은 물론 강원도에서도 영월, 평창, 정선에서 동학교도 수천 명이 봉기하여 각 지방에 그 세력이 미쳤고 황해도에서도 10월 하순 장연에서 수만 명이 일어나 젊은 날의 김구가 18세 소년접장으로서 해주성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재령, 안악, 평산, 봉산, 신천 등지에서 모두 봉기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백범 김구의 초명 이름 김창수는 이일로 승려가 되어 마곡사에 몸을 숨기며 출가한 후 온 삶을 민족독립운동에 바치고, 만해 한용운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894년 발발한 당시 고향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와중에서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자 1896년 오세암과 백담사에서 출가한 후 민족시인과 민족운동에 헌신하는 승려로 살아갔다.

추위와 굶주림과 무기의 열세속에서 싸웠던 동학농민전쟁 최후의 결전지 우금치 기념탑.

중국혁명은 흔히 ‘태평천국의 손자’와 ‘5.4운동의 아들’로 일컫어진다. 지난한 중국혁명에 성공하고 오늘의 중국을 이룩한 모택동은 ‘정권은 총구멍-총포에서 나온다’ 라고 했다. 그 자신은 일찍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라이벌인 전형적인 군인 장개석과는 달리 소년기에 손문의 신해혁명군에 의용군으로 가담 말고는 전혀 정규적인 전쟁이나 군사훈련의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손자를 비롯한 중국의 병법과 전통적인 전술에 깊은 연구를 하였고 혁명전쟁의 철학과 전략과 유격전 이론을 창안했다. 그리하여 초라하고 미약한 홍군을 결과적으로는 막강한 군대로 육성하여 중국혁명을 승리로 마감했던 것이다. 우리의 동학농민전쟁에서 민중 전체의 투지와 사기는 매우 높았으나 아쉽게도 동학농민군은 너무도 비전문적인 군사조직과 전술운용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근대적인 반란군과 근대군대의 차이와 함께 우리 동학군과 일본군대의 총포의 사정거리의 차이는 불과 70m의 동학농민군과 300m의 일군의 절대적 차이였던 것이다.

한국의 엘 콘도르 파사인 파랑새 민요와 노래.

북접과 부안의 김낙철의 동학농민혁명에서 지니는 착잡한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김낙철의 경우는 그가 양반출신이고 천석꾼의 거부라는 것이 그로 하여금 동학농민혁명에 임하여 철저하게 반봉건 반제투쟁에 떨쳐나설 수 없던 본질적 한계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는 온건하게 비폭력적인 행태로 당시 부안현감이었던 이철화나 윤시영과 함께 현상유지적 관민상화 노선을 견지하며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금치 패배 후 동학잔당을 발본색원 하려던 일본군대나 관군과 정부는 일단 동학의 수괴인 최시형이나 간부와 대접주급이면 비폭력 타협적 노선 유무와 그 행태의 여하를 크게 따지지 않고 사형을 시키려하였다. 최시형도 계속 지하에 장기간 피신하다가 결국 70대 고령의 나이로 체포되어 1898년에 처형된다. 다만 김낙철, 김낙봉의 경우에는 대기근을 당하던 제주의 수만 명의 인민들이 낙철 형제가 큰 선행으로 임하지 않았으면 주려서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을 구해준 은덕으로, 또한 4천명의 동학농민군이 성황산에 숙영하고 관아에 쳐들어와 부안현감이던 이철화를 처단하려던 위기에서 김낙철이 나서서 그 목숨을 살려주었던 그 은공으로 김낙철 형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판본 백범일지. 황해도의 소년 동학접주 김구도 18세로 동학농민봉기에 참여했다.

김낙철은 동학농민혁명의 차원에서는 이중적인 역할과 의미가 있다고 평가된다. 하나는 부안일대에 동학의 큰 힘을 가졌던 대접주 김낙철이 그의 상부였던 김연국과 최시형의 북접노선과 비폭력 행태에 복속함으로써 현상유지와 소극적 평화에는 기여하였으나 마땅히 민족의 명운이 달린 생사의 전쟁이던 동학농민혁명의 반봉건 반제투쟁에 철저히 함께 싸우고 복무하지 못한 문제점과 한계가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김낙철은 마지못해 백산봉기와 황토현 전투에는 가기는 했었지만 결코 적극적이지 않았다. 매우 중요한 제 이차 봉기에 최시형이 북접의 동원령을 매우 늦게나마 내려 손병희와 북접이 남접과 연합하여 전투에 참여하고 떨쳐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참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김낙철은 동학농민혁명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혁명적 불꽃과 에너지를 물로 만들어버렸다. 김낙철은 자신이 영도하고 있던 부안 일대의 수천 수만의 동학농민의 잠재적인 에너지를 동학농민혁명의 승리냐 패배냐의 위중한 갈림길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동원하고 싸우지 않은 것이다. 그들 형제들이 동학에 입도한 1890년에 그들 휘하에 단기간에 수천 심지어 때로 수만에 이르게 많은 부안의 민중과 농민들이 동학의 신자들이 되고 세력이 되었던 것은 그만큼 당시 부안일대의 민중과 농민들이 그들의 도탄에 빠진 삶의 정황에서 크고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을 갈급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부안에서 위대한 동학으로 민중이 하나로 뜨겁고 크게 모이던 그 놀라운 에너지는 이후 오랜 세월 후에 부안군민이 용광로처럼 하나가 된 ‘방패장 대투쟁’으로 현현되고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전쟁 최후의 결전 격전지 지도.

이순신 장군은 일찍이 임진왜란이라는 누란의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사즉생(死卽生)’을 부르짖으며 일본에 승리하였다. 전봉준이 백의한사(白衣寒士) 빈한한 출신으로 일신의 안위를 초개처럼 여기고 뛰어넘어 조선민중 전체와 민족의 운명을 위하여 혁명적으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장렬하게 죽은 것에 비하여 김낙철 형제의 경우에는 양반신분과 많은 재부를 지닌 그들이 타협적이고 비폭력적인 행태의 현상유지 노선과 명상, 수행에 머무르다가 착잡한 삶을 마감해야 했다. 김낙철의 삶은 해월 최시형과 그의 사부로 따르던 김연국에게는 충직하고 그의 몸을 바쳐 충성하였지만 동학농민혁명의 대의와 실천에는 충성하지 못한 점이 크게 아쉬운 점이다. 그러기에 그는 결국 최시형의 처형 후에 후계문제로 분열하였을 때, 스승 김연국을 따랐다가 한일합방을 청원하는 이용구의 친일적인 ‘시천교’에 김연국의 가담과 함께 그 자신도 훗날 크게 그 잘못을 후회하게 되는 십년간에 걸친 친일 시천교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뒤늦게나마 그 결정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김낙철은 시천교 및 김연국과 결별하고 손병희와 천도교에 귀의하여 그의 60평생의 회한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우금치 현장의 좌절당한 동학농민혁명 상징 조형물.

동학농민혁명은 우선 민족 내부의 모순으로 조선의 특권계급과 봉건주의가 민중을 착취하고 도탄에 빠뜨려 터져 나온 활화산이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조선과 민중을 위협하고 침략하는 척외양창과 보국안민을 함께 부르짖었다. 당시에 민족과 민족 간의 모순ㅡ제국주의의 침략은 너무도 위중한 민족존망의 상황이었고 일제의 침략은 필연지사였다. 두 개의 모순이 다 같이 중요한 갈등과 대립과 모순이었지만, 어쩌면 질적으로 민족내부의 모순은 민족 간의 비타협적 적대적 모순에 비하면 부차적 모순이었을 것이다. 그 상징과 실체가 관민상화와 폐정개혁을 위한 집강소설치와 통치였다. 그러나 고종과 민씨 척신세력이 조급하여 우리 민족을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제물로 삼은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 민족과 민중을 식민지 노예로 넘기면서 그들은 일본황실의 하부체계와 장식물로, 구통치배들은 작위수여와 친일귀족들로 대접받으며 일제의 통치와 착취에 철저히 복무하고 기생계급으로 살아간 것이다. 동학혁명의 와중에서 도인감사 별명을 얻으며 전봉준과 동학 측에 협조하였던 김학진은 훗날 그와 비슷한 통치귀족들과 함께 친일파로 작위를 얻고 살아갔다. 반면에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면서 ‘시신혈하’를 이루면서 싸우며 죽어가는 그들의 나라를 위한 의리와 용기에 지켜보며 느낌이 많았던 토벌군 대장 이규태는 훗날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는 의병에 가담한다. 1895년 을미사변 후 그는 봉기한 홍주의병에 대하여 중군장으로 이들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의병장 김복한 등과 내통하여 일본군을 죽이고 그는 끝내 의병이 되고 사라졌다.
어쩌면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모이칸 족’과 같은 슬프고 장렬한 역사가 도처에 있다.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접주이상의 간부급 50명이 공주의 곰나루를 건너와 전북 대둔산 최후의 항전지에서 고산지역의 지도자 최공우를 중심으로 험준한 해발 750m의 암반정상에서 1895년 2월까지 겨우내 70일을 항전하다가 마지막으로 25명이 최후까지 싸우며 죽어갔다. 일본군 3개 연대와 조선관군 200명과의 장렬한 전투였다. AD 70년경 대로마에 맞서던 전설적인 유대민족의 ‘마사다 항전’처럼 어린 아이 하나만 살아남게 하고 모두가 죽어갔다. 바위 절벽에 뛰어내리며...

녹두장군 전봉준 상

사이몬과 가펑클이 남미 잉카-페루의 토속적인 슬픈 음악을 리바이벌한 <철새는 날아가고>의 가사는 이렇다. -달팽이가 되기보다는 참새가 되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못이 되기보다는 망치가 되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멀리 멀리 떠나고 싶어라/ 날아가버린 백조처럼/ 인간은 땅에 얽매여 가장 슬픈 소리를 내고 있다네/ 가장 슬픈 소리를/ 길보다는 숲이 되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지구를 내 발밑에 두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 El Condor Pasa
남미 안데스의 잉카의 멸망을 콘도르로 상징하여 노래한 슬픈 이 노래처럼, 우리의 동학혁명과 녹두장군 전봉준을 노래한 <파랑새> 민요와 노래는 우리민족의 회한과 깊은 한의 노래이기도 하다. 슬픈 노래와 전설처럼 처절히 실패했던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은 이 땅, 이 민족의 민중인 우리들 모두에게 장엄한 민중의 영원히 내릴 수 없는, 부활로 살아 오르는 깃발인 것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않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가보세 가보세 /갑오년에 가보지 못하면 / 을미적에 병신되리.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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