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흑백사진 속의 동학농민혁명 백산 웅거터의 원경

동학농민혁명에서 백산봉기와 창의는 참으로 빛나는 역사적 승리의 서장이었다. 그것은 빛나는 오월의 찬란한 승리의 서장이었고 진운의 깃발과 함성과 노래였다. 그리고 백산에서의 2차의 집결과 웅거 속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은 온전한 지도부를 구성하고 항전의 군사적 체제와 조직을 완료하고 천하에 그들의 혁명의 창의의 대의를 선포하며 밝혔다. 비록 연합전선적인 결합이었고 아직 동학 내부의 북접의 조직적 결합은 훗날 삼례에서의 역사적 만남이 남아있었으나 남접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혁명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전 조선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은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을 상대로 한 정읍의 황토현 싸움과 장성의 황룡촌 싸움들의 연이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물밀듯이 그 여세를 몰아갔다. 그리하여 호남의 수부와 웅도이며 조선왕조의 발상지라고 자부하고 저들의 위패와 태조의 진영이 모셔져 있는 전주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승리를 일구며 당시에 제주까지 포함되던 전라도일대를 호령하게 되었다. 무장으로부터 백산봉기와 웅거에 이은 황토현과 장성 황룡촌 승리에 이어 전주성의 진격과 입성에 이르는 가장 찬란한 동학농민혁명군의 승리의 역사는 모두 갑오년 오월에 이루어졌다. 이 1894 갑오년 오월의 동학농민혁명 상승기의 그 중요한 흐름과 추이는 우선 백산봉기에서 비롯된다.

만추의 백산동학혁명창의탑과 동학정

동학혁명의 발발원인이 된 만석보가 있던 동진강과 고부천이 큰 젖줄을 이룬 비옥한 평야지대인 백산면은 부안군 읍내의 가까운 인근이며 이곳의 주산인 백산의 높이는 해발 47m에 불과하지만 광활한 부안과 김제 평야지대에 우뚝 솟았기 때문에 백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의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며 일찍이 660년 경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는 백산성이 그 곳에 있다. 또한 상서면에 위치한 울금산성과 백산 일대는 백제 유민들이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켜 나당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인 백강전투 현장 중 한 곳이라 추정하고 있다. 이 같은 배경 속에 최근세 조선의 위대한 역사 현장이 백산이 되었다. 동학혁명의 발발 당시에 고부 쪽에서 군수 조병갑 등의 관군을 공격하여 섬멸한 농민군들은 흰 옷을 입고 죽창을 무기 삼아 호남의 수부 전주를 향해 진격을 목표로 했다. 동학농민혁명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전봉준은 아직 그의 장살당한 부친 전창혁의 상중이어서 삿갓에 흰 상복차림으로 장수의 상징으로 호피를 얹은 백마를 타고 진중을 영솔하며 진군하였다. 고부와 이평, 영원, 김제, 금구, 정읍, 부안, 고창, 흥덕과 함평, 멀리 순천과 광주 일대에서 전주로 진격하기 위해 이 때 백산에 모여든 수많은 농민군이 ‘일어서면 백산, 앉으면 푸른 죽산’ 형상을 이뤘다. 대부분의 농민군의 옷이 흰옷이었고 그들이 대부분 무기로 죽창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려 20일간이나 이곳에서 토성을 쌓아 만 여명의 동학농민군이 웅거했던 백산은 참으로 동학농민혁명과 민족의 장엄한 성지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곳 백산은 전라북도 사적지에서 국가사적지로 그 등급이 상향 조정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곳의 성역화는 참으로 그 현장을 찾은 이들에게는 너무도 초라하고 아쉬운 현실이 아닐 수 없음은 안타깝고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온전한 성역화는 커녕 지금 백산은 상당한 부분들이 사유의 묘지들이나 주택들로 점유되어 있는 실정이다. 너무도 역사적으로 장엄했던 동학농민혁명과 민족사의 찬란한 성지에 대한 모독과 부끄러운 상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부안문화원의 안타까운 증언에 의하면 수년 전에 모처럼의 성역화의 재원이 마련된 바도 있었지만 그 재원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여 다시 국고로 반납하였다하니 이런 무능력과 재변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곳, 백산에는 1989년에 동학혁명 백산창의비가 세워졌다. 장영석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 비문을 썼다. 그러나 대단히 아쉽게도 과거 동학농민혁명군의 백산봉기대회는 뚜렷한 역사적 자료가 부족했다. 그러던 차에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현 주산면의 기씨 문중의 한 선비가 쓴 ‘홍재일기’에서 백산봉기대회일이 1894년 음력 3월26일(양력 5월1일)이라는 뚜렷한 기록이 발견됐다. 이에 근거하여 부안군 차원에서 ‘동학군은 1만여명이 참여하는 백산봉기대회를 열어 외세의 침략을 막고, 봉건주의를 타파하고자 하는 폐정개혁을 위한 창의문 격문과 4대 명의, 12대조 기율을 발표했다. 백산은 동학군이 진정한 혁명군으로 거듭 탄생한 곳’이라 밝히며 이 같은 백산봉기대회일의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을 현재 추진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옛 호남의 수부 전주성의 원경

5월 1일의 백산봉기에 이어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부안관아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별초군 250명과 보부상으로 편성된 관군을 이끌고 부안 방면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관군은 5월 10일에서 11일 새벽에 걸쳐 도교산에 근거를 둔 동학농민군과 황토현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이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으로 진격하여 관아를 점거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의 보고에 의하여 동학농민군의 승리와 무서운 기세를 알게 된 정부는 5월 6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경군을 보내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홍계훈은 장위영병 약 800명을 3개 대대로 나누어 해로를 통하여 전라도 군산포에 이르렀다. 그러나 5월 11일 전주에 입성한 경군은 매우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300명의 도망자가 속출하고 병력이 반감되어 있었다. 이 상태로는 동학농민군과 싸움이 힘들 것으로 판단한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의 파견과 또한 청나라군대의 차용도 아울러 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증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5월 19일 장위영병 300명과 강화병 500명을 증파하였다. 증원군들이 인천을 떠나 영광 법성포에 이르렀을 때에 동학농민군은 이미 영광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전주에서 머물러있던 홍계훈은 증원군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5월 22일 동학농민군 추격에 나서 전주를 출발하여 남진을 시작하였다. 3부대의 경군은 정읍,고창,영광을 거쳐 장성에 이르렀다. 27일에 증원군과 합류한 홍계훈의 경군은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여 드디어 장성 남쪽인 황룡촌에서 접전을 벌였다. 처음에 경군의 별동대는 동학농민군에 대하여 기습적인 포격을 가하여 사상자 수십 명을 내게 하였으나, 즉시 반격을 받아 패주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으며, 이 여세로 5월 28일에는 장성을 떠나 북상의 길에 오르고 5월 31일에는 드디어 전주성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황토현에서 패배한 뒤 전주는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어서 전라감사 김문현은 성내에 남아 있던 군졸과 민정들로 전주를 방어하려 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놀라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다투어 도망치고 말아 사실상 동학농민혁명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을 하게 되었다.

현 백산성지 현장에는 사유건물들과 묘지들이 점유되어 있다

500년에 걸친 조선왕조 전 역사와 시대는 물론이고 전체 한반도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승리와 중요한 점령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일대 사변이었으며 민중적 승리였고 쾌거였다. 조선왕조의 큰 반란이던 홍경래난도 평안도의 수부인 평양성이 아닌 단지 정주성을 점거하였던 것이다. 전주는 조선왕조에서 한양과 맞먹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었으며 호남의 웅도였다. 이 같은 사태 앞에서 무능한 정부와 지배계급으로서는 간이 콩알만큼 해지고 도저히 자력으로는 거대한 동학농민혁명군의 대의와 세력과 기세 앞에서 참으로 패색이 짙은 무섭고 위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왕조의 운명과  뿌리를 뒤흔들며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초라한 모습이 된 이러한 상황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는 겁을 먹고 비굴하게 마지막 카드로서 사대의식에 절은 그들의 체질대로 종주국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이 결정을 반대한 조정의 어윤중과 같은 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무능한 고종과 실권자 민영준이 주도하는 민비 척신일파들이 조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결국 청국군대 파병안이 결정되고야 만 것이었다. 그리고 이 청국군대 파병요청과 그를 수락하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는 것은 호시탐탐 조선의 침략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천진조약 위반을 빌미로 그들로서는 천우신조와 같은 조선에의 일본군대 출병과 침략의 명분을 허락하는 구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 신문에 실린 총을 들고 등에 주문을 단 동학농민군의 모습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 지도부는 이 같은 청나라에 이어서 일본의 침략을 불러올 수 있는 미묘한 국제정세의 상황을 예민하게 지켜보면서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주를 점령한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성내를 지키면서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 무렵, 정부의 구원요청에 따라 2.800명의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고, 뒤이어 8.000명의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해 옴으로써 사태는 동학농민혁명과 우리 민족의 운명에 참으로 긴박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태들이 뒤이어 숨 가쁘게 전개되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