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 조기 얘기는 근·현대 역사 속에서 운명처럼 붙어 다니며 닮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기를 잡기위해 전국의 배들만이 아니라 일본배들도 이 작은 섬에 모여들었다.
  1920년대부터 치도리가 조기 어항으로 각광을 받는다. 섬 앞에 있는 두 개의 딴치도가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어 풍랑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치도는 살막금에서 시작해서 치도리 당집 아래까지 위도에서 가장 넓은 갯벌이 형성된 곳이다. 이곳은 풍선배들의 선착장이었고, 그물과 풍선을 손질하는 수리소가 있었다. 기둥을 세우고 겨우 바람만 막은 술집은 거친 파도와 싸우며 조기를 잡던 뱃사람들의 유일한 여흥의 공간이기도 했다. 군산 출신 소설가 이근영은 신문에 ‘변산반도 탐승기’를 연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파시 철이 되면 위도에 모이는 어선, 임시우편소, 술집에 있는 작부들의 노래로 위도가 떠나갈 듯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8년
 
  동력선과 나일론 그물이 등장하면서 1940년대 초에는 조기어항이 파장금(波長金)으로 옮겨갔다. 파장금은 수심이 깊어 물때와 관계없이 배들의 정박이 가능했다. 배들이 한창 모여들 때는 파장금에서 옆 섬인 식도까지 배 위를 걸어서 오갈 수 있었다고 했으니 바다 가득 배가 촘촘히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파시(波市)가 형성되고 선박들이 모여들면서 파장금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주변 산까지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람 둘이 겨우 지나 갈 정도로 골목을 좁게 만들었고 술집과 여인숙, 세탁소, 미장원이나 각종 음식점들이 줄을 이었다. 이준수 라는 사람은 조기로 번 돈을 세다가 돈이 너무 무거워 말캉(마루)이 무너졌다는 말이 전한다. 식도의 송부자는 조기어장으로 번 떼돈을 항아리에 담아서 보관했다. 장마철을 지나면서 항아리에 있던 종이돈에 곰팡이가 피자 동네 아낙들을 불러 물로 씻은 다음 빨랫줄에 걸어서 말렸다고 한다. 오가는 사람들이 볼가 봐 아기 낳으면 치던 쌈줄을 대문에 쳤다고도 한다. 위도 개들도 천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위도 경제는 흥청거렸다. 
  해마다 위도를 들썩이게 했던 조기는 70년대 초에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조기로 주목을 받고 경제의 대부분을 유지했던 위도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위도를 들어가면 파장금의 골목을 헤집고 다니면서 옛 영화를 확인했다. 이 작은 동네에 다섯 개 정도의 공동 우물과 작두시암 하나를 확인했다. 사람들이 많이 살다 보니 우물도 많이 필요했으리라. 아직도 집이나 벽에는 장미세탁소, 목포여인숙, 삼오정, 협동상회 등의 페인트로 쓴 글씨가 남아 있다.
  위도를 찾는 사람들은 ‘위도는 볼 것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큰 신작로 길로 30분이면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으니 이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그러나 위도를 조금 깊게 들여다보면 역사와 문화가 곳곳에 숨어 있다. 이곳 파장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곳을 소개하는 안내판이라도 세우고 조기잡이에 참여했던 어부들의 경험이나 장사하던 사람들의 얘기라도 얹으면 좋으리라. 위도 파시를 아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니 증언이라도 채록하여 남기는 일이 시급하다. 아직도 위도에는 조기파시를 기억하고 그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정재철 (사)부안이야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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