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을 ‘실학(實學)의 선구’라고도 하고 ‘실학의 비조(鼻祖)’라고도 부른다. 그러한 인물이 부안의 우반동에 살면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는 사실은 부안의 자랑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유형원을 이어 이익으로, 그 뒤를 이어 정약용으로 계승되면서 실학이 전승되고 발전됐다는 사실도 배운다. 그런데 이 글은 ‘유형원을 실학자라고 불러도 좋을까?’라는 다소 돌발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지역의 자랑인 이러한 인물이 실학자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글을 쓴다는 것은 읽는 이들에게 당혹감을 줄 수 있고 비난을 면치 못할 수도 있다.
  이 글을 씀에 있어서는 두 권의 책을 참고한다. 반계의 제자 김서경의 『담계유고(澹溪遺稿)』와 김용옥의 『독기학설(讀氣學說)』이다.
  첫 번째 출발은 실학이라는 시대정신은 조선사상사의 특정한 조류를 규정하기 위하여 후대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사상사에 과연 ‘실학’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는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이 따른다. 상식적으로 유학자들은 자신이 하는 학문이 실질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실학(實學)이라고 했지 허학(虛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자의 책 『中庸章句』에서도 앞머리에 실학이라는 언사가 있는 것을 보면 주자학은 실학이라는 등식도 성립한다.
  실학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일제 치하에서 서구 문물에 노출되고 민족주의를 자각한 소수 엘리트의 글에서 시작된다. 광주학생운동(1929)과 일본의 만주침공(1931)을 고비로 한국 민중의 저항운동이 완전히 봉쇄됨에 따라 내적이고 심층적인 저항 운동뿐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 민족운동의 사상적 기치로 실학이 개발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최남선이 조선후기 신학풍을 실학이라고 최초로 얘기하고, 문일평은 실학을 실사구시학의 동의어로 썼다. 정인보·안재홍 등은 정약용 서거 100주년 기념토론에서 실학자를 ‘근대국민주의의 선구자’로서 자리매김하며 서양의 루소와 비교하기도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발전단계를 서양의 틀 안에 가두면서 왜곡될 여지가 컸다.
  1930년대의 지성인들은 일본문명의 성공적 근대화 작업을 서구화로 인식하고 일본문명이라는 창으로 서양을 바라봤다. 이런 점을 극복하고 조선사상사에 실학이라는 개념 없이도 조선 후기사회를 기술하고 사상적 유형을 새롭게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형원은 조선의 혼란을 마음아파하고 삼대(三代,하 은 주)를 숭상하고 지향했다
 
왕정의 근본이란 백성의 재산을 재정하는 것만 같은 게 없고, 다스림의 도는 바르게 가르치고 기르는데 있다. 한 시대에는 태평성대와 혼란이 있으나, 도에는 고금의 차이가 없다. 참으로 삼대(三代)의 제도를 행한다면 삼대의 정치 또한 오늘날 회복할 수 있다.

윗글에서 볼 때, 유형원이 지향한 것은 중국의 왕조인 하(夏) · 은(殷) · 주(周)이다. 또한 유학자로서 성리학에서 현실 방안을 구하고자 했다. 원시 유학 속에서 해결방안을 찾고자 했으니, “유학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라는 생각 속에서 살았다고 얘기 할 수 있다.
  유형원이 실학자이냐 아니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궁벽한 시골에 살면서, 외세 때문에 위난에 처한 조선의 나아갈 길을 고민하고 책을 써서 후세에 남겼고 자신의 처지에서 ‘행동하는 지성’을 보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학이라는 고정된 렌즈로 유형원을 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을 통해 세상을 볼 필요가 있다. 마치 그의 방에서 햇빛 가득한 밖을 보듯이…

정재철 (사)부안이야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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