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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민중사 ⑤-반계 유형원의 자발적 유배(?)와 우반동 세월
경기 용인으로 옮기기 전의 우반동 유형원의 원래 묘소. 관리가 소홀해 잡초가 우거져 있다.

허균이 우반동을 떠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한 세대가 지난 35년 만에 유형원이 다시 우반동을 찾아온다. 한양에서 거하던 그가 과연 왜 부안 우반동에 온 것이었을까? 유형원의 부안 우반동 거주 20년 세월은 훗날 호남실학의 본류를 이은 정약용의 유배가 강제적인 형벌에 의한 타율적인 유배였다면 어쩌면 유형원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한 자발적 유배의 시간이었을까?

원래 허균이 우반동을 찾아오고 이곳에 정사암을 만들 즈음에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과 만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조선왕조의 지배층 양반사대부에 속하는 허균 가문과 유형원의 가문은 멀리 가까이에 무수한 인척, 외척, 학연과 족벌로 거미줄처럼 얽혀져 있기 때문에 피차에 누군지를 아는 결코 멀지 않은 관계들이었을 것이었다. 유성민은 1612년, 그의 손자 유형원이 우반동에 이주하기 40년 전에 찾아와서 그 동안 오랫동안 묵혀져 있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8대조 유관의 사패지의 농장을 다시 일구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형원은 원래 한양에 거주하는 유력한 권문가문을 일컫은 전형적인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2살의 나이로 일찍 부친을 참극으로 잃은 후에 조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 경화사족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하멜표류기>에 언급되는 제주 목사 이원진 (1594~1665)이 그의 외삼촌이며 대사헌과 평안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김세겸이 고모부들인데, 이원진은 유명한 실학자인 성호 이익(1681~1763)의 당숙이며 또한 유형원의 모친은 여주 이씨로 이익의 당숙모이기도 했다. 유형원의 또 다른 스승인 고모부인 김세겸과 더불어 스승이자 외삼촌인 이원진은 훗날 유명한 실학자인 성호 이익이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있어 중요한 매개적 존재와 고리가 되는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유형원은 5세 때부터 당대의 일류학자들인 이원진과 김세겸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며 어린 8세 때에 이미 서경과 역경을 읽는 등 그의 비범한 자질을 일찍부터 드러내기 시작한다. 유형원은 18세에 유명한 풍산 심씨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심씨는 대사헌을 지낸 심수경의 증손녀였다.

이러한 화려한 가문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유형원은 1651년 그의 조부의 사망 후 3년상을 치루고 나서 사패지가 있던 부안의 우반동으로 1653년에 옮겨온다. 그는 조부 유성민의 간절한 바램으로 마지못해 소과에 응시하여 진사시험에 합격하기는 했으나 두 번의 과거의 낙방을 경험하고 나서는 그의 인생의 방향을 새롭게 결단하고 바꾸게 된다. 무엇보다도 유형원에게 지울 수 없는 커다란 트라우마였던 그의 부친이었던 유흠의 광해군 복위 혐의로 처형된 유몽인 옥사의 연루로 인한 자살의 비극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유형원의 나이 불과 2살 때에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검열이라는 직책도 수행했던 그의 부친 유흠이 28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으로 세상을 하직했던 것이다. 이 같은 배경과 트라우마 속에서 유형원은 사대부의 출세의 길인 과거와 관직의 미련을 끊고 32세의 나이로 우반동에 옮겨오게 된 것이었다. 우반동에서 그는 만권의 서책 속에서 새로운 조선의 개혁의 총체적인 정책과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유형원은 낙향 1년 전에 집필을 시작한 이 총체적인 작업인 <반계수록>을 그가 49세 되던 해까지 무려 18년에 걸친 세월 속에서 완성하고 필생의 저술을 마치며 진을 소진한 탓인지 그 3년 후에 홀연히 사망한다.

유형원의 사후에 그의 묘는 원래 선영이 있던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우반동에 있던 그의 큰 규모의 사패지도 부안 김씨들에게 넘어가고 유형원의 후손들도 우반동이나 부안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서울과 경기도의 이른바 근기인(近畿人)들로 살아갔다.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에 대한 큰 세미나가 최근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전라북도와 부안군이 주관을 하고 한국실학학회가 주최가 되어 열렸다. 근자에 반계 유형원에 대한 상당히 큰 학문적인 모임이었기에 필자도 마음을 먹고 다녀왔다. 그 자리에는 반계와 다산 정약용의 직계 후손 분들도 오고 조광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도 참석한 모처럼의 뜻 깊은 자리였다고 생각된다. 어떤 발표자는 학문상으로 이른바 ‘반계학’의 가능성 까지 조심스럽게 운위하였으나 이는 아직은 세미나에 참석한 학자들에게서 폭넓은 찬성과 동의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유형원의 부안 우반동 거주 20년 세월은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자발적 유배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당연히 유형원의 우반동의 20년 체재의 세월은 국가의 소위 죄를 지은 죄인의 신분도 유배의 형태도 아니었기에 그는 매우 자유롭게 스스로의 주체적인 저술활동과 아울러 틈나는 대로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그가 원하는 군사훈련이나 서당일 마을일들도 관여하거나 시도할 수 있었다.

유형원이 제자를 가르친 우반동의 반계서당

다산 정약용의 전남 강진 유배기간은 유형원이 우반동에서 반계수록을 저술하며 19년을 보낸 것과 비슷한 18년간의 세월이었다. 정약용은 유배시기에 무려 500권의 <목민심서>를 비롯한 대 저술을 남겨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뒤를 이은 실학을 집대성하게 된다. 이들은 원래는 모두 경기도 남한강 하류에 근거를 두고 살았던 경화사족의 공통점을 지니며 이른바 실학에서도 그 특성상 후기의 이용후생학파와는 다른 경세치용의 일파를 이루었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는 더욱 핍절하게 강진으로 와서 유배의 세월을 보낸다. 정약용은 총애를 받고 승승장구하던 정조의 사망 후에 그의 형제들과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가히 멸문지화의 상황에 처하여 있었다. 유형원은 그의 부친 유흠의 옥사로 인하여 벼슬에의 뜻을 거두고 우반동으로 이거, 낙향하지만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참으로 목숨만 부지하는 것도 다행스러운 참혹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의 형제 중 하나는 이미 처형된 상태였고 형인 정약전과 동생인 정약용이 동시에 유배의 길에 올랐다가 강진에서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약도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멀고 먼 바다 건너 흑산도로 떠나가는 형인 정약전과 눈물로 이별을 나눈 후 사실상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중죄인으로 유배를 온 다산을 많은 이들이 경원하였다가 겨우 어느 주막을 운영하는 늙은 노파 하나가 주막집의 방 한 칸을 내어 주어서 그나마 정약용은 그곳을 사의재라고 부르며 강진에 착근하고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록 정약용에게도 강진은 다른 귀양과 유배길에 오른 사람들과는 매우 특권적인 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근 해남에 고산 윤선도의 솔거지가 정약용의 외가였기 때문에 그는 얼마든지 그 집안의 귀한 서적과 수많은 전적들을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머슴이 다산이 원하는 서적들을 해남 외가에서 강진까지 날라오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니 이 같은 여건은 정말 다산의 학문적 활동을 위해서는 다시없이 유배라고 하는 불행한 상황 속에서 너무도 행운스러운 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특권적인 여건이 있었기는 하지만 정약용에게는 유배는 실제로 장기적인 한계상황이며 엄격한 통제 속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귀양살이었다. 이러한 핍절한 유배의 성격과 한계상황으로 인하여 정약용의 유배의 세월은 더욱 더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화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주최한 반계 유형원 세미나

이에 반하여 유형원의 경우에는 비록 자발적인 유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는 적어도 정부나 관의 그 어떠한 통제나 제재도 없는 신분상 거리낄 것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나마 조상이 남긴 사패지는 당시의 일반 백성들의 삶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나는 양반 사대부의 크고 유복한 전장규모였다. 그는 당연하게 노비들을 부리며 큰 전장을 일구었고 때때로 마음먹은 대로 사람도 찾아가고 여행도 즐겼다. 그의 우반동에 있던 옛 사패지 농장의 규모는 그의 조부가 부안 김씨들에게 매매한 토지가 30결이라는 것에서도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동네에서 서당을 열고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제자도 만들고 거두었다. 심지어 유형원은 후에 다루겠지만 그 목적에서는 문제가 있는 우반동에서 마을 청년들을 통해서 준마를 키우고 총과 활쏘기 훈련 등 일종의 군사훈련도 시키고, 심지어 배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만큼 유형원은 경제적 물질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아버지 유흠의 옥사로 인한 끔찍한 비극을 겪은 후유증이 있었고, 그 결과로 유형원이 부안에 내려와 우반동에서 20년을 머무르며 반계수록을 편찬하였지만 그는 분명한 조선왕조의 최상층부 계급에 속한 양반 사대부였다.
그가 편찬한 <반계수록>은 물론  조선왕조의 봉건적 모순체제에 대한 개혁적인 총체적 정책을 오랫동안 고구하고 만들어낸 상당한 노작임에 틀림없고 때문에 유형원과 <반계수록>은 영광스러운 한국실학의 태두, 특히 호남실학을 열은 비조와 저술로 추앙되는 것도 필연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사의 시각에서 유형원은 몇 가지 피해갈 수 없는 본질적인 한계와 제한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유형원보다 한 세대 이전의 개혁적 선구자와 선각 사상가의 삶을 살은 허균에 비해서 유형원이 학문적으로나 역사적인 세월의 후학과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허균의 혁명성이나 본질적인 민중성의 차원에서 유형원의 삶과 사상을 놓고 비교해 본다면 그 내용상 상당한 한계와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깊이 살펴보기로 한다.

글 / 최자웅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최자웅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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