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안군청이 제작한 매창 영정

불과 38세라는 짧은 매창의 지상의 삶에서 그녀가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갈구한 진정한 사랑과 세속과 세파를 뛰어넘는 그녀의 마음의 대상과 존재는 과연 누구였을까? 허균이었을까, 유희경이었을까.
매창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시와 기생으로 이름 높은 황진이는 그 무덤도 제대로 찾을 수 없는데 반해 매창은 부안민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영원한 부안의 전설과 상징이 되었다. 과연 매창의 그 생명력과 민중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매창은 18세에 유희경이라는 같은 신분적 동질성을 공유한 천인출신의 시인을 만나 28년의 나이차를 넘어서 사랑을 하였다. 후에 인조반정의 공신이 되어 이조판서등을 지낸 이귀도 김제의 현감으로 있으면서 그녀를 흔들며 잠시 스쳐갔다. 그러나 그들의 불꽃같던 사랑의 시기는 너무도 짧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매창은 비록 빼어난 시재와 거문고를 잘하는 기녀로서 이름이 높았지만 그녀는 결코 일반적인 평범한 해어화일 수 없었다. 허균도 상찬한 매창의 고결한 품성과 정신성의 차원과 그녀가 삶의 후반기에 그토록 갈구한 참선과 선경의 차원에서는 흔히 말하는 유희경의 그림자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매창이 사랑했던 거문고를 즐겨 연주한 부안 성황산의 금대

통속적이고 선정적인 차원에서는 흔히 남원의 춘향과 이도령처럼 부안의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을 운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유희경은 어쩌면 흐르는 바람처럼 장년의 그가 어리고 젊은 매창을 좋아하다가 임진왜란을 통해서 다소의 공을 세워 양반계급으로 면천되고 출세하게 되었을 때, 그가 매창을 다시 찾은 것은 만난 후 15년 후였다. 현재 매창공원 뒤편에 사랑의 테마로 스토리 텔링 전당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는 매우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행여 통속적이고 선정적인 값싼 부안판 춘향전의 연장이 아니기를 바란다. 춘향에게는 시와 철학이 없었지만 부안의 매창은 놀라운 시와 더불어 내면적인 향기와 가치지향과 초월적 정신성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허균의 신분제철폐와 세상의 개혁사상에도 상당한 공감과 깊은 교감을 매창은 신분적인 아픔 속에서 나누며 공유하였을지도 모른다.

유희경보다 허균은 나이가 젊었고 매창과는 불과 4살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당대의 조선사회에서의 신분적 차이는 참으로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창과 허균은 허균의 말처럼 결코 쉽지 않고, 결코 짧지 않은 10년의 세월을 서로 간에 정신적 도반으로서 가장 깊게 이해하고 배려하고 권유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갔다. 그리고 매창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허균은 그녀에게 병중에도 참선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도 진심으로 권유한 바 있었다. 그러나 홀연히 매창이 먼저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 허균은 진심으로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지은 슬픔의 시에서 매창이 복숭아를 훔쳐먹은 죄로 천상에서 쫒겨나 지상에 유배당한 슬픈 존재와 영혼으로 애도하였다. 원래 예언자와 혁명가와 시인은 지상에서 그들의 현실적이며 통속적 삶을 뛰어넘는 도저한 정신과 초월성으로 말미암아 흔히 지상의 저주받은 존재와 유배당한 사람들로 일컫는다.

건설중인 매창공원 옆 사랑의 테마 전당

조선에 있어서 기생은 오늘의 좋은 말로 하면 종합적 교양을 쌓은 전문예술인이었다. 그러나 신분적으로는 그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양반과 특히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는 사대부 관료들의 유흥을 위하거나 살수청을 들어야만 하는 해어화 -놀이개들이었다. 이러한 엄격하고 분명한 현실 속에서 매창 또한 참으로 어린 나이에 현감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갖은 취객과 신분적인 차별 속에서 슬프고 서러운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이 같은 매창에게 유희경은 처음에는 같은 천인이라는 신분적 동질성으로 한없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임란 후 다시 신분적 이질성으로 멀어져 간 사람이 되었다.
그런 반면에 허균은 차마 바라보지도 못할 산 같은 명문거족출신으로 약관 26세에 장원급제로 관직을 지닌 이질적 신분과 인물로 해후하였으나 그들의 관계는 너무도 내면적인 깊은 동질성과 배려와 교감과 존중으로 매창이 죽기까지 10년 세월에 걸쳐서 많은 대화와 여행과 절절한 추억을 나누었다.

허균이 처형되면서 허균과 연루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포에 떨면서 죽어가거나 쫒기는 삶을 피해서 살거나 했어야 했을까. 이런 관점에서는 매창이 남긴 수백편의 시들이 많이 훼실되었고 사람들의 구전에 의해서 전해지거나 필사되다가 고종 때에 와서야 제대로 대접을 받으며 시조집에 수록 될 때에 매창과 유희경의 로맨스가 극적으로 언급된 것이 매창의 삶과 시에서 오직 유희경만이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된 사실적 한계와 차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매창의 훼실된 수많은 시편들 속에는 허균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의 노래들도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만고의 역적 허균에 대한 매창의 그리움과 사랑의 노래라는 것이 있었다면 적어도 이씨 조선왕조가 끝날 때 까지는 허용될 수 없는 무섭고도 엄연한 불문율이었다. (심지어 허균의 직계들은 허균의 처형과 함께 몸을 숨기고 멀고 먼 새재를 넘어 경상도 깊고 깊은 낮선 땅이나 울산 쪽에서 그들의 내력을 숨기고 오랫동안 은거하다가 비로소 교산 직계라는 것을 밝히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라는 것도 역사의 현실이자 비극이지 않을 수 없는 터에 말이다.)
만약에 매창이 허균보다 조금 젊었기에 허균의 처형을 지켜보면서 살아있었다면 그 과정과 결과는 과연 어찌되었을까. 없는 죄도 만들어 무리하게 허균을 정당한 신문과 처형절차에 의하지 않고 몰아서 극적으로 죽여 버린 광풍 속에서 만약에 매창이 그 날까지 살아있었다면 그 화를 과연 면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매창 또한 허균의 억울한 처형과 옥사에 연루되어 갖은 수모와 고통을 당하면서 처형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매창은 불과 38세로 짧을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와 삶을 아끼고 사랑하던 허균을 비롯한 조선의 뜻있고 눈 밝은 사대부들이 있었고 특히 부안의 그녀의 아버지, 아전 이탕종과 같은 중인계급이나 집단은 물론이고 이름없는 민중들과 민초들도 부안의 딸인 매창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매창은 부안의 아전들에 의해서 그녀의 시들이 구전되다가 결국은 개암사에서 매창집을 발간하게 되고, 또한 부안의 시를 사랑하는 부중시사 모임을 통해서 그녀의 세월 속에서 훼실될 염려가 있던 묘소를 정성스레 보존하며 보살펴 오늘에 매창공원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특히 자식도 가족도 온전하지 않은 외로운 매창에 대한 부안 민초와 민중들의 사랑은 뜨거웠다. 그리하여 부안에서 사당패들이 연회를 열기 전에 언제나 그들이 하나의 의식처럼, 진정한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빼어난 예술인이었고 내면적 자유인이었던 매창에게 지극한 예를 먼저 표하고 그들의 연회와 예능을 부안 땅에서 펼쳤다는 것도 매우 기꺼운 부안의 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부안은 위대한 동학혁명 이전에, 삶으로서는 참으로 기구하고 가녀린 여성과 천한 기녀의 신분이었을지라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애석해하고 존중하는 부안의 한 민중적 존재와 예술가의 표상으로 매창을 오늘에도 빛나게 부활시키며 일컬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최자웅 신부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기독교사회이념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사회사상 및 종교사회학 전공)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