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보훈처 공무원과 함께 독립운동가 최순환(崔順煥, 1911~1950)의 묘소를 찾았다. 현 정부가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를 언급하면서 그동안 소홀했던 독립운동가의 묘소와 집터를 챙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2012년 기념비 제막식에 다녀 온 후로 5년이 지나다 보니 나무와 풀들이 많이 자랐다. 그 길을 몇 번이나 지나치고 땀을 많이 흘린 후에야 밭을 가로지르며 묘소에 닿을 수 있었다.
필자가 최순환 선생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선생의 아들 최기원과의 관계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선생 사업을 인연으로 10년 넘게 만나면서 배움이 컸던 어른이었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에도 증언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이 꼼꼼하게 정리한 자료를 필자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부친에 대한 얘기에 이르러서는 한숨이 더욱 깊어지고 남은 증언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학교를 만들던 후배교사의 이름을 날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겨우 들려주기도 했다.
최순환은 향리인 동진면 당상리에서 최옥환 · 박병권 등과 농민조합을 결성하였다. 최씨 문중의 재각 모성재(慕省齋)나 최순환의 집에서 농민들과 회동하여 농민조합 등을 결성한 이유로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고 치안 유지법으로 집행유예 5년을 언도 받는다.(1934.6.13 전주지방법원 형사부) 이러한 사실은 지수걸의 《일제하 농민조합 연구》에도 언급되었다.
최기원(崔基元, 1937~2009)은 부안중학교 1학년 때 겪은 일을 잊을 수 없다. 한국전쟁이 나던 그해 7월에 논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다. 알고 보니 경찰이 동진지서로 데려갔다 한다. 3일 후에는 경찰들이 퇴각하면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아버지를 줄포면 후촌 야산 골짜기에서 7월 19일 새벽에 사살했다.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40고라당’으로 불렀다. 40여명이 죽었다했다 해서 붙여진 슬픈 이름이다. 그 때 아버지는 한창 일할 나이인 갓 마흔이었다.
최순환의 해방 후 활동은 좌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보다는 진보적인 주변 지식인들의 권유로 소극적인 참여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좌익 활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해방 후에 자주적인 나라 건설의 일부를 맡는다는 책임감으로 후진 교육에 매진했을 뿐이다. 해방 후에도 야학을 열어 공부를 하고자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지역교육에 헌신하고자 당오분교를 세우기 위해 당오초등학교 설립후원회장이 되었다. 4~6㎞를 걸어서 동진 초등학교에 가는 초등학생들에게 가까운 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나라 위한 독립운동가는 유명을 달리한지 60년 후에야 독립유공자가 되고 2년 후에는 보훈처에서 기념비를 세우도록 지원을 했다. 필자는 그때 참석하여 최순환의 딸 최기숙이 기념비를 안고 오열하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왜란이 끝난 후 조선정부는 그 후로 100여년을 의병들의 공적을 찾고 어려워진 후손들을 살피고 도울 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묻힌 일들을 찾아내서 교육하는 것은 조국의 자존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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