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김낙선(金樂先, 1881~1925)이 살던 집은 상서면 윗감교 마을에 있다. 방 하나에 까대기 부엌 하나였는데 후손들이 방 하나를 달아냈고 지붕을 바꾸고 벽에 벽돌을 조금 댔다. 김낙선의 며느리 송림댁이 오랫동안 이 집을 지켰는데 고인이 되면서 작년부터는 비어 있다. 가끔 손자 김성화가 집을 찾아 살필 뿐 찾는 이가 없다. 북박골이 있는 뒷산이 해질녘이면 동네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일본헌병들의 감시를 피해 저 산을 통해 동지들을 만나러 다녔을 그의 분노와 긴장이 고스란히 마을에 남아 있다.
그가 살던 10대는 갑오농민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이 이웃에 남아있던 때였다. 농민전쟁이 잔혹하게 진압된 후에는 일본군인들의 잔인한 공포 정치가 이어졌다. 부안 의병 활동은 1909년에 집중된다. 김낙선도 28세 때인 1909년 3월에 30여 의병과 함께 부안⋅고부⋅태인 등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일본군 기병대의 습격을 받아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겨우 탈출하여 집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집에서 부상을 치료한다는 것이 쉽지 않고 치료에 진척도 없었지만 4개월 후에 다시 이용서 의병장의 선봉장으로 나선다. 부하 12명을 지휘하여 고부⋅태인⋅정읍⋅부안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였고 급기야 11월 1일에는 김제군 흥산면 내리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한 후에는 총상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집에 뉘였다. 항상 일본 순사의 감시가 따랐고 이런 속에서 주위 사람들과 왕래도 쉽지 않았다.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서 의분을 가지고 살다가 1925년에 세상을 떠나니 45세였다. 그러나 김낙선에 대한 이렇다 할 증거가 없어 그의 목숨을 건 의병 투쟁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재판받은 판결문이 발견되면서 1986년에는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거병한지 80년, 해방 후 45년이 된 때였다.
8월의 대한민국은 광복절이 있다 보니 일본의 잔혹한 행태들이 드러나면서 뜨거운 계절이 되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부안에도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뜨거울 수 있다. 그러나 묻힌다. 속으로는 다 알고 있지만 조석으로 만나는 후손들이 서로를 손가락질해가며 선조의 ‘친일과 항일’을 가르기가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김낙선 의병의 옛집을 찾는 것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작은 노둣돌이다. 문제는 집 관리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훼손되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 좋은데 가족에게만 맡길 일이 아니어서 지역의 관심이 필요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총을 들었던 그의 정신과 작고 낮은 집은 지역의 자산이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역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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