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을 차려 입은 고위 관료들이 다리 위를 걷는다. 그 뒤로 풍물패가 풍악을 울리며 따르고 얼굴에 웃음가득 띤 사람들이 춤추며 뒤를 잇는다. 다리 개통을 보러 온 사람들로 다리 위아래는 인산인해다. 이것은 1959년 3월 13일의 군포교(軍浦橋) 개통을 알리는 대한뉴스라는 이름의 24초짜리 짤막한 동영상이다. 필자는 이 동영상을 몇 번이고 보면서 이 다리 건설이 지역 사람들에게 대단한 사건이었고 숙원사업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한다.
동진강의 범람으로 홍수 피해가 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말부터 물길을 반듯하게 만드는 직강(直江)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완공하지 못했다. 직강 공사는 곡류하는 하천의 유로를 직선화하여 물의 흐름을 빠르게 하여 홍수 피해를 줄이고 농경지를 이용하기 위해서 시행되었다. 해방이 되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완공했지만 새로운 강을 건너는 다리가 필요했다.
군포교는 김제군 부량면에 속한 포구 이름을 땄지만 직강화된 동진강에 건설된 다리이고 부안 사람들이 대처(大處)로 들고 날 때 많이 이용했던 다리다. 이 다리는 1955년 6월에 착공하여 3년여의 공사로 1958년 10월에 완공된다. 당시 1억 7천 4백만 원이란 큰돈이 들어갔고 길이 370미터에 넓이는 6.5미터였다.
군포교 개통은 인근 어린이들에게도 큰 사건이었던가 보다. 백산면 금판리에 사는 조씨 성을 가진 아이는 친구와 함께 집에 알리지도 않고 뚝방길을 걸어서 이곳 개통식을 봤다고 한다. 그러나 장손인 그는 해질녘에 집에 들어갔다가 할아버지에게 된 통으로 혼이 났다고 그 때를 기억한다. 개통식 때 꽃을 든 화동은 백산면에 있던 초등학교 다니던 김00라는 여자 아이였다. 이 어린이는 현재 60이 훨씬 넘었다. 사람도 나이가 들지만 다리라고 옛날 그대로를 간직할 수는 없다. 다리 색깔도 퇴색되었고 이곳저곳 훼손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부터 부안을 드나드는 관문은 백산다리였지만, 해방 후 직강공사 이후에는 군포교가 역할을 대신했다. 당시 죽산쪽으로는 다리가 없어 나룻배가 사람들을 실어 날렸다. 50년대부터 군포교가 부안의 관문이었지만 1978년에 동진대교 개통으로 그 역할을 넘겼고 지금은 새로운 군포교가 1999년에 완공되면서 남은 일마저도 넘겨주었다.
부안의 관문으로 오랜 무게를 견뎌냈던 군포교의 세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어도, 강에 뿌리박았던 그 자존심과 존재만으로도 추억을 흔들며 충분히 나이에 걸 맞는 역할을 하고 있다. 60여 년 전 개통 때 환한 얼굴로 기뻐하며 춤추던 사람들은 시간 속에 묻히고, 시내버스가 하루 몇 대 다리 위를 추억처럼 천천히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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