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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민족 행위자] 김성수(金性洙 1891~1955)-1친일 자본가가 민족 지도자로 둔갑

·1919 경성방직주식회사 창립
·1920 『동아일보』 설립
·1932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인수 및 교장 취임
·1938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
·1941 임전보국단 감사
·1945 한국민주당 창당
·1946 대한독립촉성회 부회장
·1949 민주국민당 창당
·1951 부통령 당선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울산 김씨 김경중(金暻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울산 김씨 집안은 조선 중기 유학자인 김인후(金麟厚)의 후예로 김성수의 집안은 조부대에 고부로 이주, 김성수는 후사가 없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장남으로 입양된다.

김기중, 김경중 형제는 구한말에 주로 줄포를 통한 일본으로의 미곡무역에 종사함으로써 거대한 토지를 축적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부를 바탕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군수 등의 관직을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양아버지의 부(富)와 아울러 김성수는 담양의 토호였던 장흥 고씨 집안의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이후 활동의 유력한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김성수 일가는 줄포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는 의병의 습격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줄포에는 일본 헌병이 주둔함으로써 미곡무역을 통한 부를 축적하고, 아울러 의병의 습격을 막기에는 더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었다.
현재 줄포 우체국 뒤 ‘김상만 가옥’으로 널리 알려진 이 집은 중요민속자료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지정 자체에 대한 논란도 끊이질 않고 있다.

동족을 죽음의 전장으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제는 조선을 전시 체제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각 분야의 유력 인사들을 강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김성수 역시 중일전쟁 직후부터 이른바 ‘시국강연’의 연사로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전시동원 정책에 협력하게 된다. 1937년 9월 서울시의 라디오 강연에 나선 그는 일제의 전시동원에 협조하였으며, 또한 춘천까지 ‘강연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및 이사, 1940년 조선인을 ‘총체적으로’ 전시 체제에 동원하고, 억압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와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인 스스로 일제의 전쟁 동원에 협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과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가 합친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의 감사로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이렇듯 김성수의 일제 말기 활동 중 가장 활발하였고, 가장 많은 발언을 하고 있는 부분은 징병제와 학병제 실시(1943)와 관련된 것이었다. 일제는 학·징병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해서는 ’황국신민화‘를 위한 ’동화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 이에 따라 조선인 유력자를 동원한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 그 당시 일제의 의도에 가장 잘 부응한 사람들이 바로 조선 내의 ’지식인‘들이었다.

징병제, 학병제 찬양에 나서다

김성수 역시 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장 자격으로 1943년 8월 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함으로써 징병제와 학병제 찬양의 ‘포문’을 연다. “문약(文弱)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尙武)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논설이다.

조선의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00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희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吾等)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沈切)하였던 바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하리오. 하고(何故) 오하면 문약의 고질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라. …

징병제는 조선반도 청년의 영예이며, 조선인의 단점인 문약과 단결하지 못함을 치료할 양약이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하고 힘써 노력하여 위대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년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다

이어 1943년 11월 6일에는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라는 조선 내 지식인들의 학병 권유 연재논설 가운데 세 번째로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하기에 이른다.

현하 우리가 당면한 의무라고 하면 제군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여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聖戰)에 대한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 이 임무를 수행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앞에 열려진 것이다.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안 될 것을 나는 확언한다.

김성수는 이처럼 일본과 같은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충성과 희생이 필요하며, 그러할 때만이 진정한 황국신민이 될 수 있다는 논리로써 청년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있었다.

이로부터 김성수는 그가 운영하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학생들을 비롯하여 조선인 청년 학생들을 ‘학병’으로 내몰기 위하여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11월 8일에는 ‘학도 출진 장행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하여 “반도 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행하여 학병으로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11월 9일에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부모 간담회’를 개최하여 자식들을 전쟁터로 보낼 것을 부모들을 동원해 강요하였으며, 그래도 성과가 없자 11월 16일에는 학부모들에게 전보를 발송하여 학병에 나갈 것을 권유하는가 하면 호별 방문을 통해 강요하기도 했다. 또한 11월 17일에는 ‘학도 출진을 말하는 좌담회’에 참가하였으며, 같은 날 보성전문학교에서 ‘궐기대회’를 개최하여 훈시하기도 하였다.

11월 26일에는 “황국신민의 연성에 매진해야 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경성일보』에 게재하였으며, 12월 7일에는 징병에 절대로 협력할 뿐만 아니라, 군인의 원호사업에도 참여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12월 12일에는 ‘보전 장행회(壯行會)’를 개최하여 “학병 지원은 이 시대 최고의 영광이며, 한번 길이 열린 이 순국의 대도에 시종여일하게 돌진함으로써 학도의 머리에는 영광이 길이 빛날 것이다”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전장에 나가는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학병이 전쟁터로 나간 뒤인 1944년 1월 22일에는 “징병이 닥쳐온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여 닥쳐오는 징병에도 열심히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후에는 가두 계몽과 원호금 모금에 참여하였다.

김성수의 이와 같은 조선인에 대한 ‘학병’ ‘징병’ 동원활동이 오로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활동적’이었음에 놀랄 따름이다.

편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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