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민 변산산들바다한의원 원장
성주의 사드배치 반대투쟁을 바라보는 부안 사람들의 시선이 애잖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안다’고 그 심정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방폐장 반대투쟁’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다.
지난 7월 10일에 갑자기 성주라는 이름이 사드 배치 지역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이래, 성주는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투쟁하고 있다. 중앙 정부 정책의 희생양으로 지목된 지역의 모든 투쟁이 그러하듯이 성주도 “왜 하필 성주냐”라는 억울함이 투쟁의 촉발점이었다. 힘없어서 당했다는 억울함. 거기에다 딴 데도 많은데 왜 하필 성주여야 하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정의 감정. 그러면 바로 여기 말고 딴 곳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자기는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나타나는 생각이 ‘공정한 절차’에 대한 문제제기다. “성주 사람 무시하냐?”, “우리도 엄연한 대한민국의 국민인데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니들 맘대로 빼앗는 거냐?”라는 성토가 일어난다. 이것은 단순한 부정의 단계가 아니라, 모욕감에 근거한 분노의 성격을 띤다. 개돼지 취급받는 것에 대한 분노다. 촌놈들이라고, 숫자가 얼마 안 된다고, 권리를 짓밟고 힘으로 제압하려는 것에 대한 ‘정당한’ 분노다. 이때의 사람들 의식은 ‘성주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다만 ‘그 결정 과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이른다.
이런 주장은 “순진하고 순수한 시골 사람들이, 외부 불순세력들에게 농락당했기 때문이다”라고 매도당했다. 저들은 국민들을 우중(愚衆) 즉 어리석은 사람들, 쉽게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시키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개돼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는 정말로 개돼지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옆에 지역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어도 다음 차례가 자기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살아왔다. 그러니 위에서 보면 개돼지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돼지들이 갑자기 ‘국민’으로 깨어나 버린 것이다.
열흘쯤 지났을까? 그 때부터 성주에는 평화라는 말과 한반도 배치 반대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그 전에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정부 인사들과 소통을 시도했으나 늘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인 설명만 하려 한다. 이제 정부의 태도를 명확하게 알아버렸다. 그들은 소통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국민의 권리’를 주려는 게 아니다. 그 내막이야 뭔지 모르지만 성주 군민들을 희생양 삼으려는 것이다.
투쟁이 계속되면서 상대의 실체가 점차 명확해진다. 국방부 장관, 이 자도 아니다. 국무총리, 이자도 아니다. 대통령, 이 자가 해결의 고리를 쥐고 있기는 한데 혼자 결정한 것도 아니다. 성주 군민 앞에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실체가 느껴진다. 뭐라 딱 특정할 수 없지만, 사드는 동북아시아의 드넓은 지역에 전쟁의 기운을 조성하려는 어떤 거대한 힘이 배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숨기려는 정부의 설명은 그들이 개돼지 취급하는 국민들이 봐도 좀 어설프다. 앞 뒤 말조차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정부는 성주 군민들에게 ‘전자파 때문에 걱정이 많지 않느냐’며 어르고 전자파를 몸으로 막아 무해함을 증명하겠다며 감동시키려 한다. 하지만 성주 군민의 관심은 어느새 동북아 외교 정책으로 넘어가고 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시골의 무지랭이 때문에 국가의 대사에 개입하려 하다니, 이런 일은 니들같은 개돼지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야!’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부안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다 겪었다. 방폐장 투쟁에서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 전략이 아니라, 재생 에너지 중심의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감히’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어설프고 주제넘은 것이었던가? 부안 사람들은 어떤 국민들을 상대로도 이 주제에 대해서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렇게 했었다.
성주 군민들의 의식의 변화를 살펴보면, 소위 ‘개돼지’ 우민에서 권리 있는 국민으로 한번 발전하고, 그 다음에는 국민에서 세계시민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단순히 한 국가에 머물지 않고 세계의 평화, 인류의 공존에 대한 인식까지 다다른 것이다. 마치 부안에서 우리의 생존만이 아니라, 우리 후손까지의 생존을 추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소설일까? 우리가 겪었던 일도 사실 허황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반핵’을 외쳤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그 때의 그 생각들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다급하게 주워듣고 그냥 따라했던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의 혼란을 겪는 것 같다.
그런데 3분! 3분이면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한다. 하버드대 심리학 박사인 황상민 교수에 의하면 지난 대선 때 국민들이 선거 전에 딱 3분만 고민해 봤다면 대통령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한다. 성주 군민들의 의식의 발전은 황상민 박사의 말에 의하면 당연해 보인다. 다른 사람은 단 몇 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성주 군민들은 3분 아니라, 30분 이상도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 진지하게 사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계 평화까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처럼 어깨에 동북아 평화를 짊어지고 고민하게 된 것이다.
부안을 돌아보자. 부안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만리장성을 쌓고도 남는 고민들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그 고민의 파편들은 어디에 있을까? 당장 눈 앞의 문제들이 해결되자 사람들은 다시 무식해져 버린 것일까? 결코 그런 일은 없다. 의지의 퇴행은 있어도 의식의 퇴행은 없기 때문이다. 알아버린 것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그러면 부안에 젖어들어 있는 무기력감은 무엇일까? 성주 군민들의 의식이 일취월장 커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부안 군민들은 흩어졌던 생각의 고리들을 연결해서 진지한 고민을 이어갈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 다시 한번 ‘세계시민’으로서 자신의 기개를 펼쳐볼 수는 없을까? 애잖한 마음의 공감이 ‘세계시민의식’의 공유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성주 군민이 허락만 하면 전세 버스 불러서 응원가자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한 여름의 상념이 지구를 감싸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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