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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설거사가 득도한 성지 ‘월명암’
   
▲ 대웅전 전경
   
 
   
▲ 자재와 부식을 실어 나르는 레일

 

 

 

 

 

 

 

 

 

 

 

   
▲ 경내 연못

 

 

 

 

 

 

   
▲ 월명암에 살고 있는 강아지 천둥이와 만순이

 

   
▲ 서옹스님의 친필 편액

 

 

 

 

 불가에서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를 최고의 수행처로 꼽는다. 한마디로 산 위의 다툼이 없는 곳을 일컫는데, 불교적으로 풀면 뛰어난 경치와 땅의 기운으로 인해 스스로 번뇌와 분별이 끊어지고 가라앉는 장소를 뜻한다고 한다. 호남에서 손꼽는 3대 산상무쟁처가 바로 대둔산 태고사와 백암산 운문암, 그리고 변산반도의 월명암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년 전 통일신라시대, 한 젊은 스님이 두 명의 도반과 함께 만행을 하며 김제 성덕면 만경뜰을 지나고 있었다. 이들은 폭우를 만나 재가신도인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사람의 집에 묵게 되고, 불심이 지극했던 구무원은 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하며 밤새 불법을 청해 듣게 된다.
구무원에게는 총명하고 미색이 뛰어난 19살의 묘화라는 벙어리 딸이 있었다. 그런데 이날 이 젊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묘화의 말문이 열리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그러자 묘화는 스님에게 전생에 풀지 못한 인연이 있으니 혼인을 해달라고 간청한다. 스님은 거듭된 거절 끝에 ‘보살의 자비는 곧 중생의 인연 따라 제도하는 것’이라 생각해 허락한다. 동행하던 도반 두 사람은 이 스님을 비웃으며 오대산을 향해 떠난다.
이 젊은 스님이 바로 부설거사다.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함께 세계 3대 거사로 꼽히는 성인이다.
부설은 생전에 자신을 인품을 짐작케 하는 시를 한편 남겼다. 사람 사는 게 별거 아니라며 가느다란 대나무에 인생을 비유했다는 유명한 팔죽시(八竹詩)다. 대나무 소리 음운을 따라 ‘대로’ 읽은 재치와 일상적 삶을 초탈한 경지가 엿보이는 선시라는 평가다.

此竹彼竹化去竹   차죽피죽 화거죽
風打之竹 浪打竹  풍타지죽 랑타죽
粥粥飯飯 生此竹  죽죽반반 생차죽
是是非非 看彼竹  시시비비 간피죽
賓客接待 家勢竹  빈객접대 가세죽
市井賣買 歲月竹  시정매매 세월죽
萬事不如 吾心竹  만사불여 오심죽
然然然世 過然竹  연연연세 과연죽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
옳으면 옳은 대로 그르면 그른 대로 보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마음 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보낸다

그 뒤 부설거사는 어떻게 됐을까. 부설은 묘화와의 사이에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 10년을 함께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식구들을 모아 놓고 수도를 계속하겠다며 작별을 고하고 입산한다. 서기 691년(신라 신문왕 11년)의 일이다. 출가한 부설거사가 변산반도에서 두 번 째로 높은 쌍선봉(雙仙峰 498m)에 암자를 짓고 일념정진에 매진하니 바로 오늘의 월명암이다.
얼마 후, 옛 도반인 영조와 영희가 오대산에서 수도를 마치고 월명암으로 부설을 찾아왔다. 이때 부설은 질그릇병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워 대들보 위에 달아두고 도반들과 더불어 도력을 시험한다. 그릇은 깨되 물은 흘러내리면 안 되는 조건이었다. 영조와 영희가 병을 돌로 치자 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는데, 부설이 병을 치자 병은 깨어지고 물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부설은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이들에게 보이고 나서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목무소견 무분별(目無所見 無分別)
이청무음 절시비(耳聽無音 絶是非)
시비분별 도방하(是非分別 都放下)
단간심불 자귀의(但看心佛 自歸依)

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귀에 소리 없는 소식 들으니 시비가 끊긴다.
시비분별을 모두 놓아 버리고
단지 마음의 부처를 보았으니
내 마음의 부처에 돌아가리라
이러한 부설의 삶을 목격한 아들 등운은 훗날 유명한 조사(祖師)가 되었고 딸 월명도 수도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른다. 묘화부인 또한 부설원을 세우고 부설거사의 명복을 빌며 수행하다 110세에 고요히 입적한다.
그 뒤로 월명암에는 근대의 고승인 행암(行庵)·용성(龍城)·고암(古庵)·해안(海眼)·소공(簫空)·서옹(西翁)·탄허(呑歔) 대종사 등이 주석하며 수행정진했다. 월명암은 일제강점기 의병활동의 근거지로도 유명하다. 수난도 많았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전소되기도 했고, 6.25 전란 직전 여수 반란군에 의해 불타 사라지기도 했다.
또 월명암에는 부설거사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쓰여진 "부설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라북도에서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이 <부설전>을 도 유형문화재 제140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월명암 주지 천곡(天谷)스님 인터뷰


- 출가는?
= 오대산 월정사에서 했다.
- 은사 스님은?
= 현재 영월 법흥사에 주석하고 계시는 삼보스님인데 탄허스님의 상좌스님이셨다.
- 출가 계기는?
= 좋으니까. (웃음) 출가는 젊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도전이다. 살면서 아무리 찾아봐도 이만한 길이 없다.
- 월명암에는 얼마나 계셨나?
= 16년 있었다.
- 주지스님 오신 뒤로 사찰이 격을 갖췄다는 평가가 있는데?
= 처음 왔을 때는 현재 스님들이 안거기간에 선방으로 쓰는 작은 건물 두 개 뿐이었다. 대웅전을 비롯해 요사채 등 모든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 처음 오셨을 때 얘기를 해 달라.
=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 포크레인을 분해해서 헬기로 옮긴 다음 다시 조립해서 사용했다. 건축자재도 모두 헬기로 실어 올렸다. 이곳은 기와 한 장 놓는데도 평지의 일반 주택을 짓는 것보다 4~5배의 공정이 든다. 공장에서 산 밑까지 가져와서 다시 경운기로 옮기고 그걸 지게로 지고 올라와서 다시 현장에 넣고... 기계가 안 되니까 다 인력으로 했다. 지금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다.(웃음)
- 포크레인이 뒤집어진 적도 있다는데 많이 다치셨나?
= 다쳐야지 뭐.(웃음)
- 왜 직접 하셨나?
= 돈 준다고 해도 아무도 안 하니까 나 혼자 할 수 밖에 없었다.
- 비용도 많이 들었을 텐데?
= 국가 보조도 일부 있었지만 결국은 신도들의 시주로 이루어졌다. 신도들이 이룬 불사다.
- 월명암 중창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 월명암은 신라시대 재가수행자인 부설거사 가족이 득도를 한 호남 최고의 성지다. 이런 성지가 방치돼 있다는 사실에 불제자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다. 이런 사실이 부안군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 보람이 크시겠다.
= 그런 거 없다. 애착을 가질 것도 없다. 월명암이 앞으로 제2, 제3의 부설거사가 나오는 역할을 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 현재 안거에 든 스님은 몇 분인가?
= 한 10여 분 된다. 더 모시고 싶어도 물 사정이 안 좋아 한계가 있다.
- 한국불교가 불사에만 치중하고 수행에는 소홀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 한국전쟁 등으로 파괴된 사찰과 문화재 등에 대한 불사가 진작 끝나고 수행에 정진해야 하는데 많이 늦었다.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사찰들이 과거 융성기에 비해 아직 초라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마무리 됐으니 내용에 치중할 때라고 본다.
-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교훈이 될 만한 잠언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 대자유. 그것으로 충분하다. 밥을 먹어도 내가 먹어야 한다.
- 밥은 다 자기 손으로 먹지 않나?
= 당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옛 성인들이 근면 하라, 땀 흘려라 얘기했는데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청정한 밥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지 못하니까 욕심을 내고 과식을 하고 비굴하게 되고 일이 틀어지는 것이다.

 우병길 기자

부안독립신문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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