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끌려가지 않으려 친일 문학

3년 전이다. 중·고등 교과서에서 한 시인의 시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한국 최대 최고의 시인이자 고은 시인이 “그는 또 하나의 작은 정부(政府)”라고 일컬어온 미당 서정주의 시였다.

미당은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면 질마재마을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줄포공립보통학교,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중앙불교전문학원(동국대 전신)을 수학한 뒤 1933년『동아일보』에 시 <그 어머니의 부탁>을,『詩建設』7호(1935. 10)에 <자화상>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그는 등단 초기 <자화상>, <화사>, <문둥이> 같은 개성 있는 시들을 발표해 문단 일각의 주목을 받는가 하면,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창간한 시전문동인지「시인부락」을 통해 활발한 시단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던 그가 친일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42년 7월,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라는 평론을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창씨명으로『매일신보』에 발표하게 되면서부터다. 첫 발을 그렇게 내딛은 미당은 평론가 최재서의 주선으로 ‘인문사’에 입사해 친일어용문학지인『국민문학』과『국민시가』의 편집일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문학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그가 집중적으로 발표한 친일작품으로는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 평론)>,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수필)>, <인보(隣保의 정신(1943, 수필),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수필), <항공일에(1943, 일본어로 쓴 시)>,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 소설)>, <헌시(1943, 시), <보도행(1943, 수필)>, <무제(1944, 시)>, <오장 마쓰이 송가(1944, 시)> 등이다.

이 가운데 수필인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와 <스무 살 된 벗에게>, 그리고 단편소설인 <최체부의 군속지망>, 시 <헌시> 등은 학병 지원을 권유하거나 징병의 정당화 내지는 신성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친일작품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시가 아닌, 일반인이 접하기 쉬운 소설과 수필을 택해 친일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이 점은 1992년 월간「시와 시학」에 털어놓았던 “일본이 망해도 백년은 갈 줄 알았다” 는 말과도 그 맥이 통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항변하였으나 학병들 속에, 징병자들 속에 그는 없었다. 오직 조선 민중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위해 앞장을 서온 것이다. 또한 그가 쓴 친일작품은 당시 미당의 문학적 지위나 연배로 보아서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상당히 많은 양에 속한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
우리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없이 내리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하며 내리는 곳
.......................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 부분

친일에 이은 미당 서정주의 질주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해방이 되자 미당은 문단에도 몰아닥친 이념과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해방직후 친일파를 대거 중용, 정치기반으로 삼는 등 국시를 반공으로 한 이승만 정권에 빌붙는다. 이후 그는 1946년 최재서와 함께 부산의 ‘남조선대학(현 동아대학)’에서 강사로 있던 중『민중일보』사장이자 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윤보선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다시 올라온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자 미당은 또 전두환대통령 후보 찬조연사로, 당선자 축하 축시헌사로, 심지어는 광주항쟁과 전두환 정권수립 와중에 TV까지 출연해 전두환 후보를 향한 찬조와 헌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오직,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반민주, 반독재와 야합을 거듭, 아부와 굴종의 대명사로 남은 것이다.

아세아 자유문학상(1955), 대한민국 예술원상(1966),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2000)을 받은 비당 서정주는 2000년 12월 24일 사망, 전북 고창군 선운리 선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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