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사정으로...,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게으르고 성의가 없어서, 추석에 찾아뵙지 못하고 때늦은 성묘를 지난 주 다녀왔다. 지각 성묘를 벌충하는 의미로 직계 조상 뿐 아니라 큰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그리고 당숙들 묘소까지 죽 돌았다. 지난해 결혼한 아들 내외와 함께여서 마음먹고 공들여 한 분 한 분 더 찾아뵈었다. 그분들이 살아온 생애가 우리 집안의 역사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일부이니 새로 맞은 며느리에게 우리 집안의 뿌리를 소개하는 계기도 됐다.
성묘(라 하니 조상님들께 미안하다)를 마치고 부안 읍내로 나와 시장 안 횟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옆 자리에는 초로의 두 남자가 이른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서로 격의 없이 말하는 품세가 아마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오랜 친구 사이 같았다. 한 사람이 말했다. “먹고살기도 어려운디 정치하는 놈들은 애들 교과서 놓고 웬 싸움질이데여? 어린 학생들 까지 데모나 하고 참말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 한심혀” 이 말을 받아친 다른 친구 말에 우리 일행은 모두 뒤로 넘어갔다.
“야 인마. 아끼바리 쌀밥 먹던 아이들한테 정부미 먹으라면 누가 좋아허겄냐?”
그렇다. 계화미, 지평선쌀, 이천, 평택, 경기미 등 여러 종류의 쌀 중 제 입맛에 맞는 쌀을 골라먹던 사람들에게 ‘올바른 쌀’이라고 정부미만 먹으라면 누가 납득할 것인가?
국정교과서, 이것은 정말 시대역행이다. 단순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최고 장점인 다양성을 부정하고 획일화하는 문제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문제는 독재화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하는데, 그리고 반대가 찬성보다 2배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행태는 국민을 무시하는 독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독재보다 더 큰 문제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숨겨져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그것은 바로 친일파의 재등장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두고 더 이상 왜곡과 혼란은 없어야 합니다”라며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친일파의 재등장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불행이도 박 대통령의 말은 이미 공신력을 잃었다.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자신이 내놓은 공약을 대부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녀가 야당 대표 시절 특유의 표독스런 표정으로 당시 정부를 향해 비판하던 말이 오늘날에 와서는 정반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의 과반수가 반대하는 일을 추진하는 정부의 주장을 어느 국민이 믿겠는가.
지난 3일 황우여 장관은 당초 계획보다 이틀 앞당겨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했다. 그는 담화를 통해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단다. 자기들이 검인정한 교과서가 올바르지 못하다고 자살골을 넣었다. 같은 날 황교안 총리는 기존 교과서는 좌편향됐다고 국민을 향해 자해 협박이다. 어느 논객은 역사학자의 90%가 종북주의자라고 해묵은 빨갱이 타령이다.
오늘날 역사교과서를 가지고 이토록 이념공세를 펴는 상황은 해방정국에서 친일파들이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몰아가던 모습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미군정부터 시작해 이승만 정권이 저들의 취약한 지지기반을 보강하고자 친일파들을 대거 끌어안으면서 득세하기 시작한 매국노들이 스스로 독립운동가로 변신해 반공과 멸공통일을 외치던 모습과 똑 닮았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장교였다. 친일인명사전에 버젓이 올라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아버지 김용주도 유명한 친일파였다. 그는 친일, 즉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거대한 부를 이루었다. 이인호 KBS 이사장의 조부인 이명세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이인호 이사장은 안중근 의사와 김구 주석을 테러리스트 취급한다. 이들 세 사람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가장 앞에서 추동한다. 이런 사정이니 친일파의 재등장이라 의심을 하는 국민이 많은 게 당연하다. 친일파의 재등장은 과거 일본제국이 매국노를 앞세워 조선을 침탈한 것처럼 현재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과 맥을 같이 한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다시 시작됐다.
그러나 친일파의 재등장이 잠자던 진정한 보수를 일깨웠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지키려는 진정한 보수파들이 국정화를 반대하고 나서는 모습에서 구한말 의병의 모습이 보인다. 역사교과서를 지키는 일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요, 민족의 존립을 지키는 독립운동이다.
친일파와 독립군의 싸움은 광복 70년인 지금까지 100년이 넘도록 계속돼 왔다. 이번 국정화를 계기로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결전의 날이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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