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는 것을 강제 당하는 기분은 개운할 수 없다. 정보화 시대, 손전화의 스팸 문자와 이메일 광고도 일상을 힘들게 하지만 특히 영화관에서의 광고는 더 그렇다. 보통 20여 편 내외의 광고화면은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이 고충은 관람을 포기하고 싶은 갈등을 하게도 한다. 목적을 기만당한 10여 분. 이 보이지 않는 정서폭력은 어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참아내는 관람객의 의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부당한 행태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딘가 불편하다. 이는 자본과 권력에 자신도 모르게 복종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독재시대 영화관에서 빠트리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반공과 체제 유지에 필요한 의식화였다. 여기에는 ‘대한 늬우스’도 한 몫을 했었다. 독재의 안위를 위한 선전에서부터 상업성 광고에 이르기까지 지금보다 더 심했었다. 장장 삼사십 분 이상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듣고 봐야했다. 70년대,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때나 가능했던 영화관 출입이었기에 또래의 아이들은 그렇게라도 좀 더 영화관에 앉아 있고 싶어 했다. 어두운 공간에 구멍을 내며 이어지는 빛과 그 속에 담겨 옮겨지는 배우들의 동작은 마냥 신기했었다. 필름이 끊겨 한참을 먹방 속에 있어도 항의나 반 표를 요구하지 않았던 시절, 서구문화를 따라 들어온 이발소도 튀는 직업군의 하나로써 손님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라디오에서 대중가요를 쏟아내곤 했었다. 그러나 극장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칼라나 올백으로 넘긴 머릿결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 유행인 때, 이발소에서 풍기는 포마드 냄새는 동백기름을 밀어낸 새로운 물건이었다. 반들반들한 머릿결은 물찬 여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진한 포마드 냄새가 거리를 활보할 때면 으레 고개를 돌려 쳐다보곤 했었다. 신발이 헤지고 허름한 옷이어도 머리에 자르르 기름을 바르고 나서는 것은 사내들에겐 자존감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발소는 늘 이야기꺼리가 쌓이곤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아랫도리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입담을 못 들은 척 딴전을 부리기도 했지만, 이러한 너스레는 순서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의 에너지가 되곤 했다. 온종일 흘러나오는 라디오 속 가요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도 했었다.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극장의 반공뉴스를 보며 여린 주먹에 적개심 같은 것이 불끈거릴 정도로 의식화된 시절, 이발소의 가요 정도는 독재의 아픔을 달래주기에 충분한 장소였었다. 이는 이웃과 이웃이 빤히 보이는 삶의 형태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당시의 정서는 지금의 콘크리트 문화와 산업화에 따른 개인주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 이웃 간의 담은 없거나 낮았고 구멍 숭숭 뚫린 울타리는 대소사를 알리는 창구였다. 이는 나눔의 지경을 넓히는 통로였으며 소통의 울타리였다. 그러나 이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볼 수 없는 옛 정취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영화관만은 여전히 부당한 광고로 관람객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
개화와 함께 자본이 밀려오고 절대 권력이 무리를 짓게 된 근현대 문명의 이기는 개인화를 부추겼고 이러한 자본과 권력은 선량한 사람들을 이용해 체제유지의 심화를 다졌다. 체제유지를 위해 인문학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결과는 더불어 사는 마음새의 권력이 아닌 담벼락권력으로 이어져 세월호와 메르스의 참담함으로 드러났다. 이 틈을 비집고, 세상의 가슴이 되어야 할 문학이 국민적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어, 문인의 한 사람으로써 부끄럽기 그지없다. S 작가의 표절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디 S 작가만의 문제일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사회는 이미 표절의 방죽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칼럼이나 정치인들의 연설문, 자서전 등 TV 토론에 이르기까지 조금만 찬찬히 쳐다보면 지천이다.
슬픈 당위 같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에 입각해 어느 정도의 이해가 요구되고 헤럴드 블룸의 영향관계에서 문학이, 또는 어떠한 이론과 학설이 영향관계에 놓여 있다는 논리를 다소 인정한다하더라도 거의 똑같이 베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문제이기에 앞서 독자를 우롱하는 처사이며 사기에 해당 된다 아니할 수 없다. S 작가는 가깝게는 정읍 출신으로 그도 자본과 권력에 편승한 문학권력의 희생자일 수 있다. 예컨대 표절을 한 작가도 문제지만 자사의 이익을 위해 이를 모르쇠로 일관한 C출판사는 대한민국 문학권력의 핵심으로써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기실, 우리나라의 열악한 출판사 환경에 일말의 동정은 가나, 허물을 옹호하다가 여론에 밀려 어물정한 사과에 이른 출판사의 궁색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극장의 광고를 비롯, 그들의 감춰진 정서폭력은 분명 국민이 허락하지 않은 스팸이며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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