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부안읍


어느 가정에라도 한 장씩 있을 법한 40년 전 가족 사진이다. 가장 왼쪽이 지금은 칠순을 넘긴 우리 친정 어머니.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이가 유난히 울음이 많았다는 바로 나. 어머니 앞의 사내 아이가 큰 오빠, 가운데 분은 둘째 이모, 앞줄 눈 큰 여자 아이는 이모가 당신의 아이들과 함께 키운 시누이. 그 밑으로 시동생 두명이 더 있었다. 옛날에는 나이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자식들과 함께 키우는 일이 흔했다. 그 옆은 이모의 큰 아들, 뒤는 작은 아들, 오른쪽 막내 이모는 아직도 아가씨 처지다.

우리 어머니 나이 14살 때 막내 외삼촌이 태어난 지 채 3주가 못 돼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돼 장녀인 어머니는 세 여동생과 함께 갓난 아이였던 외삼촌의 어머니 역할까지 떠맡게 됐다. 어머니는 19살에 외아들인 아버지와 결혼을 했는데 얼마 뒤 외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린 외삼촌을 시집으로 데려와 키워야 했다.
그때 아무 말씀 없이 외삼촌을 받아 주신 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는 다른 이들의 말과는 달리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항상 그분에 대한 좋은 점만을 말씀해 주시곤 하셨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도 돌아가시자 살림은 극도로 어려워졌고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 여정은 또다시 시작됐다. 친구 엄마들은 젊고 예쁜 옷을 입고 학교에 오셨지만 우리 어머니는 항상 주름지고 검은 얼굴을 한 촌스런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학교에 어머니가 오시는 것을 꺼려 했던 자신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고 저리다. 교과서 이외의 참고서나 사전 한 권 자식들에게 사줄 형편이 못 된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따뜻한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어릴 적 언젠가 집에 걸인이 왔을 때는 없는 반찬이지만 한 상 차려 대접하던 그 모습은 지금까지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강한 기억으로 살아 있다. 또 아들이 군에 갔을 때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내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며 매일매일 한글 쓰기에 몰입해 어느 날 기어코는 오빠에게 편지를 써 보내셨던 어머니. 당신의 딸로 태어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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