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고유명사, 文피아

백성은 국가로부터 혹은 지자체로부터 존엄과 보호의 대상이며 인격적 대우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예술은 더 그렇다, 고대와 중세, 르네상스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희생자의 절박한 순간들이 수면 아래로 잠기어 간다. 재발 방지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분노도 시들해졌다. 죽어간 생명들을 이용한 당리당략을 더 이상 보지 않아 다행이라 하기엔 왠지 서글픈 마음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 시대 어두운 심해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우리 사회에 어느새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범죄 집단 ‘마피아.’ 이에 버금가는 ‘관피아’와 ‘해피아.’
문화예술계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름 하여, ‘문피아’가 그것이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말처럼 기득권이 예술계의 활동과 창조까지 규정하는 사례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만연해 있다. 필자를 비롯 힘없는 예술인들은 기득권의 네트워크화 된 메커니즘을 실감하고 있으며, 수준 이하의 헤게모니를 쉽게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여론이 가해지면 엎드려 있다가 다시 머리를 드는 기득권의 동물적 특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화의 자리에 악화를 구축한 기득권 세력들이 그 진정성을 억제하고 있는 한 세월호처럼 예술은 더 깊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편승이라도 하듯 일부 지자체 관료출신들은 은퇴 전후를 시점으로 계급인 양 예술인의 완장을 얻어 사회문화예술단체의 장을 두루 섭렵하며 노욕을 과시하고 있다. 봉사를 위장한 기득권은 휘하였던 공무원으로부터 예산을 설득하여 사사롭고 저급한 문화예술에 낭비하는 비일비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이로 인한 예술성은 기득권의 카테고리에 갇혀 왜곡된 지 오래다.
본격 예술은커녕 하이퍼에도 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원은 혈세의 낭비일 뿐 아니라 정서의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정서의 함양을 위한 명분이 오히려 난립한 문화행사로 인해 스트레스다. 그렇다면 가치의 여부가 묵인된 기념사업과 무분별한 문화행사 나열의 근시안적 퍼포먼스는 이제 그만 떠나야한다. 아울러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도 고민해야 하며,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적이고, 가치의 결함이 있는 선심성 문화 프로젝트의 퍼포먼스를 가려낼 심미안이 없다면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를 만들어서라도 세금의 낭비를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카르텔 수준의 예술이 표심 때문에 묵인되고, 심지어는 기득권과 정치가 win-win 되어 왔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의 깊이와 진경보다는 카르텔 수준의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정치예술의 현장을 찾아 혈안이 된 정치인들. 그들의 뒷배가 되어주는 우리의 세금이 슬프다.
그들 나름대로 이유는 있으려니. 예술에 대해 무지하거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착각 또는 유착은 예술의 아방가르드적 사유를 짓누르고 똘레랑스를 살해하고 있다. 이념의 거대담론이 사라진 이후, 예술 그것도 문학이 시대의 가치관에 대해 계몽적이어야 할 당위는 없지만 무관해서도 안 된다는 게 평소 필자의 생각이다. 하여, 예술과 창작의 자유와 참신한 참여가 소외를 떠나 권장되어야 한다. 순수예술의 지향과 계몽적 예술의 패러다임은 단선적이기는 하나, 모든 종교가 그렇듯 예술 또한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이라 함은 내가 아니다. 타자를 말함이다.
도덕경에 생이불유生而不有라는 말이 있다. 만들었지만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로써 어떠한 조직이나 삶에서 성과를 이루고 스스로 물러난 만큼 빛이 난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풀이해도 무리는 없겠다. 공을 세우고 드러나지 않을 때 그는 이미 드러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비견되는 말로 성서는 ‘오른 손이 하는 걸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두 잠언은 이 시대를 향해 들려주는 성인의 공통적 메시지로써 결국 드러내고자 하는 공은 욕심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욕심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과 고정된 가치가 되어 지자체의 문화예술계를 비롯해 사회 전반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을 불공정공화국에 이어 파벌공화국, ‘기득권공화국’으로 잠식되어 왔다. 이러한 작태는 결국 미래를 짊어질 젊은 예술 지망생들에게 공정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팽배를 안겨 주었으며, 기성 예술인들의 창의적 참여와 지원을 빼앗아 갔다. 하면, 뒷배들의 힘을 업은 기득권 완장들의 정치성 문화예술 퍼포먼스에 행정도, 대중도, 휘둘려서는 안 된다.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록되어지는 것이며, 훗날 평가되기 때문이다.
희망은 있다. 신문고를 움켜쥔 진정성 있는 예술인들이 어려운 현실에서도 창작을 기반하고 있고,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챙겨준 단원고 학생들 같은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희망을 주고 보듬어 주었다. 침묵하는 예술인도 세월호의 희생자도 죽은 것이 아니다. 이 사회의 병든 곳을 밝히는 등대로 우리 곁에 서 있다. 그 빛은 깨끗한 백성의 눈이며, 불의를 향해 직언하는 나단*의 눈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정부는 개혁 트렌드 중 하나로 전문가의 등용을 언급했다. 행정에 전문가적 안목의 이식을 통한 깊이와 지경을 넓히려는 목적도 있겠으나, 전관예우의 비리를 끊고자 하는 것에 비중의 의미를 더 두었을 것이다. 즈음하여, 부안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지자체에서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치와 범죄는 평행선을 긋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방 선거 100여 일이 지난 요즘, 신임 수장首長들께서는 수장水葬을 염려한다면 한번쯤 점검해보길 권한다.

*성서의 선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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