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독립신문의 창간 1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느라 노랗게 바랜 신문을 뒤적이다가 2006년 10월 발행신문 지면에서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우편으로 발송되는 독립신문의 특성상  주소가 적힌 발송용 띠지에 신문을 접어 넣어야 비로소 인쇄된 신문의 발송준비가 끝나게 되는데 그 작업을 매주 한 번도 빠짐없이 100번째 도와주신 장효종(75), 김옥섭(70)씨를 소개하는 기사였다. 건강히 잘 계시는 지도 궁금하고 당시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 만나보았다.
“부안성당 사목회 여성부회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성당 여신도들이 사회참여에도 적극적이시던데요. 물론 독립신문에도 열심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오랫동안 해왔던 사목회일은 작년에 내려놓았습니다. 문규현 신부님 계실 때 성당의 여신도들도 열심히 했었지요. 신부님께서 새만금방조제를 반대하는 삼보일배를 할 때는 매일 밥을 해서 서울까지 가는 길에 함께 했습니다. 그 후로도 신부님 하시는 일은 발 벗고 나서서 함께 했죠. 신문에 애정을 가지게 된 것도 시작은 그것이라고 할 수 있죠.”
“2년 넘게 한 번도 빠짐없이 신문을 접는 일을 하셨더군요.”
“처음 신문 나올 때에는 신문도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고 신문 접고 띠지 끼우고 하는 일도 큰일 이었어요. 그래도 그 땐 신문사에 사람들이 넘쳤어요. 남자 20명, 여자 10명 정도가 모여서 오전에는 띠지를 끼우는 작업을 하고 점심을 먹고는 접은 신문을 품에 안고 부안 전역으로 나눠 주러 나가곤 했지요. 꼬박 하루가 걸리는 일이었지만 여럿이 함께하니 힘든지도 모르겠더군요.  . 단순한 일이라 지겨울 만도 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면서 하면 금새 또 되더라고요. 그렇게 2년을 넘게 목요일 아침 9시면 나오라고 말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도 자동으로 나오는 거예요. 신부님 떠나신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했는데 언젠가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신문사대표가 바뀌고 시끌사끌 할 때 쯤 목요일 출근을 중단한 것 같아요.”

장효종씨는 서른 살에 부안신협이사장을 역임한 신이근(81)씨댁으로 시집을 왔다. 당시에는 상당한 노처녀, 올드미스였다고 한다. 어렵게 배운 미용기술도 오빠의 반대로 써먹지 못하고 낙담하며 집에만 갇혀있었지만 항상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라 그 쪽 분야에서 일을 하려고 작심하고 시집가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란다.
부안으로 시집온 후 친정과 시댁이 모두 천주교 신자 집안이라서 자연스럽게 부안성당에 나가게 되었고 그 후 성당사람들과 정읍 이평에 있는 요양원에 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목욕봉사하면서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그 후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유명한 곳이 되어버려서 다른 소외된 곳을 찾아 부안으로 향했다. 목욕봉사를 주로 하러 갔는데 지금처럼 시설도 없고 좋은 제도도 없을 시절이라 목욕보다는 엉망인 집안을 정리하고 청소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한다.
가슴을 여는 심장수술로 한 번, 3년 전 위암수술로 또 한 번, 두 차례의 큰 수술을 받으면서 남을 위해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장효종씨는 전북대병원 집도의사가 수술 날짜를 잡아주며 정리할 것 있으면 정리하고 오시라고 하더란다. 하지만 장씨는 “내가 누구한테 빚 진 것 없고, 누구랑 싸워서 원수 진일도 없고 하니 몸이나 깨끗이 씻고 오면 되지요... 뭐!”라고 말했단다.
참으로 자그마한 체구와는 달리 대담함과 쿠~울함이 거침이 없다. 지금은 다시 건강도 회복되어 가고 하니 성당사람들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새로운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하신다.   “어렵게 생긴 신문인데 잘 했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사람들 처지를 살펴서 도와줄 수 있어야 하고 부정한 사람들 따끔하게 혼내기도 하고 그렇게 잘 해야지요. 그리고 내가 지금은 평화신문 하나만 보는데 독립신문 다시 하나 넣어 주세요. 기념식에 가니까 신문 다시보고 싶은 맘이 막 생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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