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기가 감돈지가 엊그제인데 벌써 초여름 날씨의 높은 기온을 보여주는 요즈음입니다. 냉탕 온탕의 사우나를 하는 기분이랄까요. 농촌에서 씨뿌리기 준비도 하기 전에 농번기가 시작된 느낌이고요. 벚꽃도 열흘 앞당겨 피어 있고 지역 간 시차도 없이 동시에 만개를 하여 시간을 두고 지역여행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체가 보이지 않은 곳에서 소리 없이 생동과 약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자기 몫을 다하려고 나름의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도 어쩌면 자연의 섭리 속에서 살아간다 할 것입니다. 초목들이 대지를 품에 앉고 소리 없이 신진대사 활동을 하듯 사람들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얼마나 자신의 노력을 경주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도 달라질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일, 즉 노동을 통해 성취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란 꼭 육체적 활동에 국한된 것이 아닌 통합적인 것입니다. 그 통합적 인간의 활동을 우리는 ‘일(노동)’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통해서 자제심, 집중력, 적응력, 인내심을 키우고 단련시켜 갑니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나름의 인생목표를 향해 전문기술과 재능을 익히고 숙련시켜 일상의 어려움도 해결해 가면서 즐기기도 하여 행복한 삶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일은 그래서 ‘생존의 법칙’이라 표현합니다. 누구든 살기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삶을 즐기고 싶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일을 한다는 것은 괴롭고 힘든 형벌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자랑과 명예이기도 합니다. 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목표도 성취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루어낸 위대한 업적이나 유물 등은 결국 인간의 노동을 통해 얻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은 재난과도 같은 것입니다. 강력하고 귀한 쇳덩이라 해도 방치하고 보면 녹에 부식되는 것처럼 게으름과 나태, 태만과 같은 행동은 결국 사람의 인생을 좀먹고 불행과 실패만 있을 뿐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그들의 생활상을 보고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만큼 천한 삶이 없고, 일에 몰두하는 생활만큼 고귀한 삶이 없다”라 했습니다. 또 로마 황제 세베루스는 영국을 점령하면서 로마 고위관리들이 직접 땅을 일구는 모습을 보고 로마의 힘의 원천을 깨닫고 “게으름은 죄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로마 지배계급들이 나태해 지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지자 하루아침에 망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게으름은 방종이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원천입니다. 개인의 삶의 타락은 물론이고 나아가 국민적 성향이 게으르다면 나라까지도 멍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처럼 나름의 잘 살게 된 원인은 60, 70년대 보릿고개를 넘기며 허리띠를 졸라맨 50대들의 성실한 모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사회적으로 명성은 물론 성공과 성취도 없습니다. 개인의 진정한 행복도 없으며 삶의 의미나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잔꾀나 부리고 무위도식無爲徒食(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음)하는 자들은 정신까지 썩어서 재난과 불행을 자초합니다.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벌레가 들끓는 것처럼 게으른 자의 머릿속에는 부패한 생각이 가득 차 있어 악마의 포로에 묶여 불행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결실은 몸과 마음의 기능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참신하게 움직이고 활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황폐한 정신에서는 아무 결실을 거둘 수 없습니다. 곡식을 가꾸지 않는 황폐한 땅에서는 잡초만 무성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마샬 홀 박사는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할 일 없이 보낸 시간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변명을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습관을 버립시다. 게으른 자는 결코 성취와 보람의 열매 갖지 못합니다. 또 얻을 수도 없습니다. 콩을 넣고 맷돌을 돌리면 맛있는 콩물이 되어 나오지만, 콩을 넣지 않고 맷돌을 돌리면 맷돌이 망가지고 말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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