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건강이 말머리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웰빙 친환경 유유 워터파크사업’, ‘웰빙 향기 나는 부안 하수관거사업’, ‘웰빙의 거리 조성사업’등등. 부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공사현장마다 써 붙인 안내판의 글귀들이다. 온통 파헤치고 깎아 내리는 개발의 현장에까지 이처럼 ‘웰빙’이니 ‘친환경’이니 하는 꾸밈말을 붙여대는 걸 보면 환경과 건강이 말머리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행복’, ‘안녕’을 뜻하는 영어말 ‘웰빙(well-being)’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 시골 구석구석까지 그 유행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특히나 부안에서는 이렇듯 군에서 앞세우는 웰빙의 구호가 과거 군사독재정권이 이끌었던 새마을운동식 ‘잘살아 보세’를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아 자못 염려스럽기도 하다.

70년대, 초등학생이었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새마을운동은 날마다 세상이 뒤바뀌는 것 같은 전진과 개발의 역사였다. 당시 학교에서 가르치던 노랫말처럼 ‘초가집은 없애고, 마을 길은 넓혔’으며, 밤을 낮처럼 밝히는 전등불 밑에서 눈이 부시도록 책을 볼 수 있었던 게 4학년 때의 일이다. 안방에 텔레비젼이 들어오고, 전화가 연결되고, 컴퓨터를 통해 한눈에 세상을 보게 되기까지, 문명은 어제의 궁상을 떨쳐 버리고 도시와 똑같은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었다.

그러나 잘살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지금, 정작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야 할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고 없다. 번듯하게 포장된 동네 안길에는 정복자의 탱크인 양 육중한 몸체의 트랙터가 썰렁하게 버티고 섰을 뿐, 고샅에는 아이 그림자조차 없어 사람의 씨마저 마르고 있다. 왜일까? 그토록 애써 잘 살게 해주었건만 왜 모두 떠나고 없는 것일까?

군사정권 이후 지금까지 이 땅 민초들의 굽은 허리를 더욱 짓누르며 줄기차게 진행해 온 ‘잘살아 보세’의 행진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만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분석이 있겠지만, 정부 중심의 독재행정과 개발만이 살 길이라는 개발지상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고 나는 본다. 정부가 알아서 예산과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서만 집행하는 상명하달의 방식. 이는 주민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자주와 자립의 싹을 시초부터 잘라 버리는 이 나라 정부들의 오래된 병폐였다.

또한 개발만 되면, 즉 겉모습만 바뀌면 잘살 수 있다는 개발만능의 사고는 한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한 세대 동안 줄곧 우리를 몰아붙여 왔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황홀한 첨단문명의 옷을 입고 있지만 사람 냄새 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정신의 가난을 뼈아프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 세대를 에돌아 웰빙이라는 듣기에도 설은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21세기형 ‘잘살아 보세’를 우리는 또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 것일까? 배고픔은 면했으니 건강이나 지키며 살아 보자고 골프장에, 운동장에, 산허리며 논밭 뙈기들을 마구 내주고 부른 뱃살을 억지 땀으로 빼야 하는 것이 진정 잘사는 길일까?

나는 건겅보조식품 정도로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웰빙의 의미를 왠지 개발독재의 냄새가 묻어나는 ‘잘살다’보다는 ‘잘 존재하다’로 풀이하고 싶다. ‘잘살다’가 그동안 나만의 부, 나만의 행복, 나만의 건강, 나만의 권력 등 반민주, 반평화, 반생명을 불러일으키는 회오리바람이었다면, ‘잘 존재하다’는 함께 나누는 풍요, 더불어 사는 행복, 자연과 우주까지 생각하는 건강, 정치 없는 다스림 등 민주와 평화와 생명의 돛배를 밀어주는 순한 바람이라 할 것이다.

사탕 중에 누룽지 맛 사탕이 있다. 누룽지 맛 사탕은 사실 누룽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저 누룽지 맛을 내는 향신료가 들어갔을 뿐인 가짜 누룽지 사탕이다. 웰빙이니 친환경이니 하는 꾸밈말이 자꾸만 ‘누룽지 맛’의 속임처럼 여겨지는 이때, 우리는 웰빙에 대해, ‘잘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곱씹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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