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에 대하여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했다. 윤창중이가 한 일이었지만, 같은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지난 10일 SBS의 한 앵커가 ‘뉴스하기도 싫은 날이다. 내가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날이다.’라고 한 것은 국민의 심정을 적절하게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를 했다. “국민 여러분들께 큰 실망을 끼쳐 드린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라는 표현과 “…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런데 부끄럽다는 표현은 없었다. 안타까웠다. 부끄러워해야 했다. 국민들 앞에서 머리를 제대로 못들 정도로 부끄러워해야 했다. 그런 인물을 잘못 기용한 것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고 참담한 심정을 국민들 앞에 보여야 했다. 그러면 지금 국민들이 부끄러워하는 심정이 더더욱 커졌을 것이다. 대통령이 4대 악의 하나로 지목하고 척결하고자 하는 성폭력도 많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부끄러워하면, 그 밑에 부하들이 부끄러워 할 것이고, 그런 부끄러움은 온 국민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대한민국의 국격까지도 높아졌을 것이다. 이것이 맹자가 말하는 최고 지도자의 덕목 아니었던가?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의지 표명은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대통령은 분개했을 뿐이다. 분개로는 사람을 제지할 수는 있지만 감동시키지는 못한다.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한자를 보자. 恥(치)는 도리에 어긋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愧(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 차이를 탓하는 부끄러움이다. 예로 들면 무심코 교통법규를 어겼을 때, 스스로 자책하며 부끄러워하는 것이 恥이고, 왜 잘 모면하지 못하고 자기만 단속되었는지 창피해 하는게 愧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恥心은 스스로 반성하고 갈고 닦게 만들고, 愧心은 이기기 위해서 분투하게 하게 만드는 마음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치심과 괴심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회에서 치심이 중심이 되느냐, 괴심이 중심이 되느냐는 그 사회 제도와 사회 지도층의 역할이 큰 몫을 한다. 사회의 흐름이 경쟁중심으로 이익 중심으로 이루어지면 그 사회는 괴심이 중심이 될 것이다. 따라서 공공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괴심을 견제할 치심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 5년 MB정부 하에서 인격적으로 저열한 자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짐으로서 완전히 물구나무 선 사회를 경험하였다. 이런 시궁창 같은 상황에서 윤창중이라는 한 상징적 모델이 다시 우리에게 어떤 길을 갈 것인지 묻고 있다.
윤창중이 성추행을 저지른 것은 자신의 행동이 부도덕하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이성적인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이후에 변명하는 내용을 보라. 그리해서는 안되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치심이 없다. 마음의 영역인 것이다. 마음은 감동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다.
지금 국민들이 모두 느끼는 부끄러움, 치심은 그 자체로 소중하게 키워내야 할 良心(양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양심을 키워서 사회 전반에 치심의 부끄러움, 도리에 어긋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회복해야 한다. 만약 피해 여성이 미국 국적이 아니라, 한국 국적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나라 정부는 그 피해 여성을 보호했을까? 우리 언론은 그 피해여성을 보호했을까? 우리는 지금처럼 분노했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들어야 현재 느끼는 부끄러움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고의 지도자인 대통령은 그리하지 않았지만, 밑에서라도 그리해야 사회를 바르게 보전할 수 있지 않을까? 덜 부끄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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