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을 두고 봉기(蜂起)라 한다.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 농민들의 저항운동은 규모와 이념적인 면에서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는 한편,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불린다.

▲ 봉기를 연재하는 서주원씨
동학농민혁명운동은 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오랫동안 다양하게 진행돼 온 것이 사실이다. ‘동학농민혁명운동’ ‘농민반란’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 등 다양한 형태의 명칭으로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그 옛날 과거의 역사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형태상으로 농민전쟁이지만 역사적 사회적 성격에 있어서는 농민혁명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농민혁명이라는 명칭에 운동이 붙은 것은 이 운동이 완전히 성공하여 집권을 하지 못하고 운동으로 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혁명이든 혁명운동이든, 농민운동이든 간에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떨치고 일어나 집단적으로 펼친 이 저항운동은 일종의 민중봉기가 틀림없다.
당시 고부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주지하다시피 조선 후기의 탐관오리(貪官汚吏)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 때문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만석보(萬石洑)를 증축할 때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를 징수 착복하였으며 무고한 사람들에게 허무맹랑한 죄목을 씌워 그들의 재산을 착취했다.
한편,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고 금품을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자행했다. 이에 격노한 군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했으나, 조병갑은 듣지 않고 오히려 학정을 가중시킴으로써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부농민들의 민중봉기였던 동학농민혁명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속칭 부안사태로 일컬어지는 부안반핵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부안반핵운동의 발단은 김종규 부안군수가 군의회에서 부결된 위도 방폐장 유치 청원서를 들고 독단적으로 산자부를 찾아간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당시 적지 않은 부안사람들은 군수 김종규를 갑오농민전쟁을 일으킨 고부군수에 빗대어 ‘제2의 조병갑’이라 칭했다.
2003년 5월에 시작돼 약 2년 정도 전개된 부안군민들의 반핵운동은 비록 봉건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을 극복해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반봉건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으로 확산된 갑오농민전쟁과 같은 전국적인 규모와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군수의 독단에 항거하고, 도지사와 대통령이 공권력을 동원해 자행한 무자비한 폭력진압에 맞서 싸운 시골 사람들의 항쟁이자 생존권 투쟁이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운동이 빈농층이 주체가 된 사회변혁운동이었다면, 부안항쟁은 농민과 어민들이 주체가 된 핵없는 세상을 꿈꾸는 반핵운동이자 환경운동이었으며 실종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민주화운동이었다.
부안반핵투쟁의 형태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앞으로 의미 있는 시도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부안반핵운동을 일컬어 부안사태라 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32주년을 맞았다. 지난 32년 동안 정부와 광주광역시,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와 언론 등을 통해 등장한 ‘5·18’의 명칭은 광주사태, 광주민주화운동, 5·18 민주화운동, 5·18 민중항쟁, 5·18 광주민중항쟁, 5·18 민주항쟁, 5·18 광주의거, 광주오월민중항쟁, 5·18 광주항쟁, 5·18 사태, 5·18 사건, 5월 항쟁 등 어림잡아도 10여개가 넘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5·18’은 1980년 5월21일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 18일부터 연 4일째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군부에 의해 처음에는 ‘폭동’으로 규정됐다고 한다.
이후 독재정권인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광주사태로 불렸다는데, 6공화국 때인 1988년 민주화합추진위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명하면서 이 명칭이 일반화됐다고 한다.
광주폭동과 광주사태로 불리던 ‘5․18’이 세월이 흘러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듯이, 이 나라 대한민국에 부안인들이 단 한명이라도 살아남는 한 지금까지 별 생각 없이 사용해 온 부안사태라는 용어는 언젠가는 보다 신성하고, 보다 성스러운 명칭을 얻게 될 것이다.
어쨌튼 우선은 ‘부안사태’라는 명칭의 사용을 가급적 삼가고, 대신 ‘부안봉기(扶安蜂起)’로 불러 주는 것이 경찰계엄으로 불리는 국가폭력에 맞서 싸운 부안군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부안봉기’라는 명칭이 어색하고,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적어도 ‘부안반핵운동’이나 ‘부안민주항쟁’으로 명칭을 바로 잡았으면 한다.

2013년은 부안반핵운동 10주년이 되는 해!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싶지만 내년은 부안반핵운동 10주년이 되는 해다. 2003년 이후 지금까지 부안인들은 그 시절의 한을 제대로 풀지 못했다.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부안반핵운동 10주년을 그냥 무의미하게 보낼 수 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규모를 떠나서 어떤 식으로든 그 시절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는 기념행사를 치렀으면 한다.

서해훼리호 참사와 부안반핵운동 등을 소설에 담을 터!

1993년 10월10일, 위도에서는 서해훼리호 침몰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인해 292명이 운명하셨다.
서해훼리호 참사는 위도의 역사와 위도인들의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위도 방폐장 문제가 위도 사회의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 시킨 것 처럼 서해훼리호 참사도 위도 지역사회의 공동체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서해훼리호 참사가 일어났던 1993년은 내 나이 스물 아홉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 드라마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의도 방송가를 얼씬거리던 시절에 서해훼리호 참사 소식을 접하고 나는 위도로 급히 내려가서 그 처참한 현장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었다. 시신 수습 이후 서울에서 상당 기간 동안 계속 된 보상금을 제대로 받기 위한 유가족들의 보상금 투쟁을 도왔다.
부안반핵운동이 시작된 2003년은 내 나이 서른 아홉이었다. 스물 아홉엔 서해훼리호 참사를 경험했고, 서른 아홉엔 부안인들의 반핵 투쟁을 온몸으로 경험했던 것이다.
2013년 내 나이 마흔 아홉엔 위도에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서해훼리호 참사나 방폐장 문제 같은 끔찍한 일들이 다시는 내 고향 위도에서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1993년 서해훼리호 참사를 전후 한 위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2003년에 발생한 부안반핵투쟁 과정에서 부안인들이 겪은 처절한 삶의 이야기를 소설 봉기에 담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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