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고전 함께 읽기(하)

신영복의 고전 함께 읽기 마지막편으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그 실천적인 방법들을 동양고전에서 찾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근대사가 풍요의 역사라는 환상을 청산해야

四十而不惑 사십이지불혹(논어)


나이 40 때를 불혹이라 이릅니다. 미혹이 없다는 것은 다 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환상을 갖지 않아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류의 5대 공적을 흔히는 BIG 5 라고 해서 빈곤, 질병, 무지, 오염, 부패 이 다섯가지를 꼽습니다. 이 다섯가지를 자본주의 200년의 역사가 다 해결했다는 환상을 버리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 해결 못했어요. 오히려 심각하게 악화시켰다고 전문가들이 보고 있습니다. 우선 빈곤 해결 못했어요. 세계 인구의 33%가 빈곤 수준에 있습니다. 빈부 격차만 훨씬 더 커졌어요. 빈곤 수준이라는 것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것이에요. 하루 오만명이 굶어 죽습니다. 3만명의 어린 아이가 죽고 있습니다. 질병 해결했습니까. 새로운 질병 계속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어떤 생태계 파괴 일어나고 어떤 질병에 노출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질병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이 자본주의 2-300년 역사가 아닌가. 그다음에 무지. 문맹이 없어졌다는데. 지(知)가 무언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정보를 아는 것이 지인가. 아니잖아요. 지를 공자한테 물었는데 지란 지인(知人), 사람을 아는 것, 인간에 대한 이해를 ‘지’라고 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관계를 황폐한 시키는 이러한 제도 대단히 무지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 오염과 부패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사회, 이런 위기, 오늘의 현실입니다. 부패 문제도 단지 법률적인 위법적인 것이 아닌 낭비 체제입니다. 낭비, 자원과 인간에 대한 엄청난 낭비 체제 바로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 역사의 가장 부정적인 면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동의 질서, 패권적인 질서를 운동원리로 하는 근대사가 과연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 왔는가에 대해 우리가 냉정하게 환상을 청산하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동의 질서, 패권적인 질서를 운동원리로 하는 근대사가 과연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 왔는가에 대해 우리가 냉정하게 환상을 청산하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환상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안에 있는 ‘동’의 원리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실천적 방법들을 다음에서 소개합니다.

우리들 속의 존재론 반성해야

우리들 속의 존재론을 반성해야 합니다. 묵자의 墨悲絲染과 國亦有染(묵비사염과 국역유염)이란 구절로 여러분들과 나눠보려고 합니다. 묵자가 실이 물든 것을 보고 슬퍼했는데, 이어 비단 ‘실 뿐만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복숭아 하나를 훔치면 절도가 되고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 되는데, 전쟁을 일으키면 오히려 영광이 되는 이러한 인식이 나라를 잘못 물들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을 키우고, 다른 사람보다 경쟁력이 있으면 훨씬 행복할 수 있다는 동의 원리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예로 하나 더 들고 싶은 것은 ‘미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子夏問曰 巧笑?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자하문왈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자왈 회사후소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왈 례후호 자왈 기여자 상야 시가여언시이의(논어)


이 텍스트의 내용을 설명하자면 자하라는 제자가 공자한테 시경의 구절의 의미를 질문을 합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구절 다음에 나온 흰 바탕(素)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논어에는 선어, 즉 화두같은 이야기가 많은데 공자가 “그림 그린다는 것은 흰 바탕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냐 하니 금방 알아 들었답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예’ 즉 인간성이군요, 하니 공자가 매우 칭찬하는 구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오늘날 인간성이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말에 아름다움이란 말의 뜻은 알만하다는 고언입니다. 반대말은 모름다움인데 지금 상품 미학에 젖어 있는 우리들의 미적 정서에서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지 않고 모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고 있어요. 거꾸로 역전되어 있어요. 이게 상품 미학이 전도돼있는 미학입니다. 무언가 친숙하고 알만한 것은 아름답지 않고 그게 진짜 알만한 건데, 잘 모르는 것처럼 나온 것, 뉴디자인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미적 정서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미적정서의 도착은 문화적인 종속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바깥에서 들여 오는 게 훨씬 좋습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문화가 우리 것에 대한 경멸이 있고 바깥에서 오는 것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실천적 관계론으로서의 연대가 희망

다음으로 우리는 변혁의 역량들을 천천히 모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모아 갈 건가를 고전에서 뽑아봤습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노자)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불쟁 처중인지소악 고기어도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불쟁 고무우(노자)


노자의 물의 철학입니다. 요지만 설명하겠습니다. 노자의 철학에서 물이란 것은 그 당시를 살아가는 가장 약한 민초들을 상징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가장 약한 표현으로 물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물의 철학이 험난한 춘추전국시대에 부국강병의 패권주의 시대에 민초들이 살아가는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은 절대로 다투지 않습니다. 산이 막으면 돌아 갑니다. 이걸 많은 사람들은 투항주의냐 개량주의냐 투쟁의 포기냐 그러지만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천한다는 의미로 풀어야 합니다. 자기의 주체적인 역량과 객관적인 조건의 억압성을 잘 판단해서 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이 물입니다. 자기 역량이 부족하면 비가 와서 웅덩이를 다 채울 때까지 기다렸다 나아갑니다. 이것이 물의 ‘부쟁(不爭,)’,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 낮은 곳에 나아간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물은 바다입니다. 그러나 바다는 큰 물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시내를 받아 드립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운동단체에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하방연대’입니다. 물처럼 낮은 곳으로 연대하라. 높은 곳으로 연대하는 것은 추종, 복속입니다. 대기업 노조는 중소기업 노조와 연대하고, 노동운동은 농민운동이나 빈민운동,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연대하여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연대해서 바다를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 인식틀을 바꾸어 나가는 기본적인 전략, 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의 철학을 가져야

小狐?濟 未出中也 濡其尾 不續終也
소호흘제 미출중야 유기미 불속종야 (주역의 화수미제 괘)


그리고 일하는 작풍, 즉 방법이 ‘길’의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주역의 제일 마지막 괘가 이상하게도 미완성 괘로 끝나는데, 저는 ‘세상에는 완성은 없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해요. 이 구절에도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는데 꼬리를 물에 적시고 말았다. 이로울 바가 없다. 끝내지 못하리라.”라고 나와요. 끝나는 것은 없습니다. 계속 됩니다. 무엇을 완성하기 위해 태어났나, 그렇지 않아요. 일하는 것이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하면 쉽게 좌절하고 지칩니다. 도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짧을 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길은 그 자체가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겁니다. 만약 우리 삶이 미완성이라면 목적달성을 위해 하는 일은 잘못된 설정이라고 봅니다. 일 자체가 한없이 아름답고 좋아서 해야 해요. 그래서 오래 할 수 있는 일 버틸 수 있는 일을 해야 된다고 봐요.

제가 무기징역이었잖아요? 저는 징역살이 하면서 그 징역살이가 오로지 출소하기 위해서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 이십년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끝내고 출소를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것 이런 게 아니었어요. 대단히 많은 것을 저는 깨달았어요. 세상에서 모멸과 가난과 학대 속에서 전과 딱지 달고 힘들게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생활을 통해서 정말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를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지요. 그다음에 해방 전후사 격동기의 정치공간에서 온몸으로 살았던 분들 장기수 할아버님들 계시지만 그분들을 통해서 우리의 해방전후사가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실제로 보면서 깨달았어요. 그래서 저는 20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1학년 밖에 안나온 고리끼가 부모 일찍 여의고, 배를 탔는데 그 주방장이 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책을 읽고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나의 대학시절이라는 책을 썼던 것처럼요. 고리끼는 빈민촌에서 살았던 그 2년 동안을 ‘대학시절’이라고 규정을 했거든요. 정말 저는 그시절을 대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아름다워야 해요.

성찰과 양심 그리고 자부심을 가져야

?之人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惟恐其似己也
려지인야반생기자 거취화이시지 급급연 유공기사기야(장자)


불구자가 한밤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고 그 아기를 살펴봤어요. 급히 서두른 까닭은 그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봐 두려워서였다는 거에요.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이만큼 절실하게 나온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잘못 물들고 있는 도착된 정서와 잘못되어 있는 환상들을 청산하는데 뼈아픈 일침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리고 자부심 가져야 해요. 동화 중에 어린 요한이라는 것이 있는데 버섯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길을 가다가 얘야 이것은 독버섯이다라고 가리켜요. 지목당한 버섯이 깜짝 놀라니, 옆에 있던 버섯이 “너는 독버섯이 아니야”라고 위로를 해요. 그래도 위로가 안 되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그건 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버섯들이 하는 말이 더 중요하지”라고 하는 거에요. 사람들이 하는 말은 이 버섯은 사람들이 먹을 수 없다는 식탁의 논리인데 그것이 왜 우리에게 필요하냐는 이야기인데 대단히 자부심 있고 주체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항상 근본적인 것을 보자. 잎사귀가 다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에 남아있는 단 한 개의 감 안먹는 거지요. 씨 받는 것이잖아요. 이것이 주역에서는 제일 어려운 상황을 표현한 것이에요.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제일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을 읽어요. 그러면 이 그림에서 희망을 읽는 방법을 찾아내야 돼요. 첫째는 잎사귀를 다 걷어내요. 거품은 걷어내고 알몸을 보자. 우리 사회의 구조를 보자.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의상을 벗고 냉정한 자기 자신을 성찰하자. 그리고, 떨어진 잎사귀는 땅의 뿌리로 가잖아요. 근본으로 돌아가자. 우리 사회의 뿌리는,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그걸 따뜻하게 길러내야 합니다. 서경에 나오는 오행 다 아시지요? 수화목금토. 옛날 사람들은 다섯 가지의 가장 소중한 자원을 ‘수화목금토’라고 불렀는데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은 인간관계 속에서 완성됩니다.

정리= 이향미 기자 isonghm@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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