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이 사람 - 부안향교 김정락 전교

   
 
장맛비가 하루 종일 오락가락 내리던 날, 부안향교 김정락(77) 전교를 만났다.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고 맞이하는 김 전교의 모습은 선비 그 자체였다.

김 전교는 매일 향교로 출근을 한다. 요즘 유림 숙직실 겸 관리실 짓는 일을 직접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 목수로 잔뼈가 굵었건만 칠순이 훌쩍 넘긴 나이에도 집짓는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제152대 전교에 취임한 김 전교는 한옥 건축의 명인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0호 대목장답게 그의 향교사랑은 끝이 없다.

경기도, 부산, 전남, 충청도 등 전국적으로 지은 집들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최근에 지은 무형문화재 전수관도 그의 손길을 거쳤고, 부안의 빼어난 집들은 김 전교의 솜씨다. 한학과 전각 및 서예에 능통해 부안향교 양사재 현판도 직접 써서 달았다.  

어릴 적 11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는 그는 예의범절이 몸에 배어있다. 부안읍 내요리 1구 마을에서 1934년 출생하여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듯이 세상살이는 음양의 이치로 돌아가고,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니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그는 말한다.

해방 후 양민증 발급을 위해 그 시절 여자들은 도장이 필요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어린 김 전교는 서당에 공부하러 다니던 중 취미로 도장을 파서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나눠줬다.

그러자 입소문이 나서 너도나도 주문이 들어오고, 그들은 대가로 집안일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어린 시절 손으로 만드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변변치 않은 낫과 주머니칼로 혼자서 길쌈재료에 쓰이는 물레, 베틀, 보대, 북 등 만들기를 즐겼고, 동네 집 짓는 곳에 일부러 쫓아가 구경하면서 재미를 느꼈다.

동네 사람들이 차분한 성격인 그에게 약서를 가르치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약방 일을 하게 됐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시원한 그늘 밑에서 약재 썰고, 약 짓는 일이 무척 따분했다.

차라리 뜨거운 뙤약볕에서 집짓는 목수일이 재미있었다. 추석 명절 때 집에 돌아온 그는 동네 목수를 따라 나서버렸다.

김 전교의 목수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때가 스무 살의 나이였다. 농사짓는 것보다 오히려 목수 일은 힘든 줄도 몰랐다. 배우는 처지라서 명절 때 받은 품삯이라곤 고작 닭 한 마리, 양말 한 켤레가 전부였지만 그저 행복했다.

24세에 부인 강연순(74)씨와 결혼하여 8남매의 자식을 두었다. 돼지우리를 짜고, 헛간도 지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일했다. 서로 우리 일을 먼저 해달라고 주문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동네 일 잘한다고 칭찬 했고, 서서히 목수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집짓는 큰 공사는 하루아침에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조형선 선생을 비롯하여 평생 동안 숙련된 여러 목수들을 선생으로 두었다.

그는 한옥 예찬론가다. 한옥과 함께 삶을 산 그에게 굳이 말이 필요 없겠지만, 못하나 박지 않고 친환경공법으로 짜 맞춰진 한옥은 전체를 들어내서 그대로 다시 옮겨 지을 수 있고, 웬만한 지진에도 뒤틀리면서 견디는 게 장점이란다.

평소 충효사상의 근간인 전통계승과 예절교육을 중요시 했다. “한문 공부는 자세와 몸가짐부터 달라져 자연히 예절교육이 된다. 인성교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급수 따는 한자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될 수 없다”

신임 김 전교는 사자소학, 신천자, 명심보감 등 여름방학 동안 학생들에게 향교를 개방하여 한문교실을 개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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