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국민연극 라이어I’을 들고 거짓말처럼 부안을 찾은 부안 출신 배우가 있다. 다름아닌 주인공 스탠리 가드너 역을 맡은 배우 손강국(50)이다. 이름은 낯설지 몰라도 그가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는 낯설지 않다. 영화 곡성, 조작된 도시, 성난황소 등에 출연했고 드라마에서는 황금빛 내인생, 경이로운 소문 등에서 얼굴을 내비쳤다. 다만 주연을 빛나게 하는 조연인 탓에 기억 어느 저편에 머물고 있을 뿐 그가 배우라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다.
두 번째 날 공연 리허설이 시작되기 1시간 전 예술회관 연기자 대기실에서 그를 만났다. 연극 라이어의 스탠리 가드너와 성격마저 닮은 듯한 천상배우 손강국의 인생사를 듣는데 주어진 1시간은 너무 짧았다.
당초 기자가 느낀 배우 손강국을 기사로 쓰려고 했지만, 행여나 빠질 수 있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말

 부안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소개해 주세요

네 저는 부안 상서가 고향입니다. 상서중학교를 나와 부안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기 전에는 영화감독이 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주로 접한 영화가 할리우드이거나 홍콩영화입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오우삼 감독의 영화에 빠져 있었죠. 그래서 막연히 감독의 꿈을 키웠는데 감독을 하려면 좋은 배우를 뽑는 시선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다면 연기를 접해보자 해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지금의 배우 손강국의 시작이었죠

부모님은 모두 안 계십니다. 아버지는 제가 5살 때 돌아가셨죠. 그런 아버지가 사실은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6.25때 통역관을 하실 정도였느니까요. 아버님은 임관하시고 나서 농사가 적성에 안 맞으셨는지 서울에서 술도 많이드시고 그렇게 삶을 즐기시다 가셨습니다. 어머니도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요. 제가 6남 1녀 중 밑에서 두 번째인데 부안에는 형님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부안에는 자주 오는데요.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시간이 되면 내려옵니다.

배우가 되는 과정을 쭉 말씀해 주시죠

고등학교 2학년때죠. 연기를 배울수 있는 곳이 없어서 무조건 금요일날은 학교 결석을 하고 서울로 연기학원을 다녔습니니다. 그러니까 금, 토, 일은 서울에서 보내고 나머지 평일은 부안에 있었죠. 그러다 고 3때 선생님께 연영과 입시를 준비하겠다고 말하고 본격적으로 연기에 전념했습니다. 그렇게 연기를 배우다 보니 점점 연기에 매료되기 시작했죠. 그중에서도 연극의 재미에 빠졌습니다. 그때는 연극 빼고는 연기가 아니다는 나름의 자부심도 생겼죠.

대입도 미루고 연기를 배우던 중 군대 영장이 날라왔고 1급인데도 부안에서 보충역을 받았습니다. 제대하자마자 짐 싸 들고 대학로가 있는 혜화역으로 갔습니다. 당시 기억 남는게 냄새인데요. 정말 냄새부터 달랐습니다. 자~ 여기서부터 내 땅이야 그랬죠.
그때가 제가 20~21살 때였는데 당시 마로니에 공원은 오후 4시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뒤바뀝니다. 포장마차가 모두 펼쳐지면서 공원을 다 덮는 그늘이 드리워집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연극의 2막이 오르는 것이죠. 그 포장마차 아래에서 말로만 듣던 유명 연극배우들 간에 역사가 이뤄집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싸우는 소리, 혼내는 소리 등 온갖 소리가 저에게는 아리아로 들렸습니다.  당시 최종원 선배를 처음 뵈었는데 저에게 “소속 극단이 어디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어디 어디 극단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했더니 그 극단 선배를 바로 부르더군요. 여하튼 그 포장마차 아래에서는 같은 소속인지 아닌지를 떠나 연극이라는 큰 하늘 아래 모두 다 선후배가 되는 자리였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군기가 무척 셌습니다. 흔히 ‘빠따’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런 문화가 미투 전후로 많이 달라졌죠. 저도 지금은 후배들과 그런 관계가 아마도 아닙니다.

그런 냄새와 아리아에 취해 극단에 들어갔죠. 그때는 청소할 얘들을 무조건 받아줄 때라 입단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극단에서는 새벽에 봉산탈춤을 2시간 추고 밥을 먹은 후 창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발레나 재즈댄스, 장구, 북, 징, 피아노 등 이런 것들을 가르쳐 줬습니다. 모두 다 공짜였죠. 당시에는 이게 내 연기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배우가 되려면 이런 것들을 해야 하나 보다 해서 이유 없이 받아들였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포스터를 붙이기 시작합니다. 1연이라고 출판소에서 나오는 한 묶음을 들고 두세 사람이 붙입니다. 그걸 다 붙이고 오면 당시 3천 원을 받았습니다. 이후에는 선배들 공연 연습하는 것 보면서 노트 들고 뒤에서 적죠. 연기를 그렇게 공부했습니다. 지금처럼 누가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어깨넘어 보고 배웠습니다. 그런 배움의 과정에 하나의 의심도 없었고 이게 배우의 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제가 25세 때 돼서야 극단에서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는 한마디로 짬밥대로, 선배 순으로 주인공이 정해지는 데 그때 처음 오디션이 열렸죠. 당시 공정성을 갖기 위해 다른 극단 분이 심사위원이었으니까 실력대로 뽑겠다는 오디션이었죠. 경쟁율이 7~8대 1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제가 주인공으로 선택됐죠. 너무 기뻤습니다.
작품 이름이 ‘박중혼 대 최먼수’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명배우인 박중훈과 최민수가 되지 못한 3류 배우들의 얘기를 담은 연극입니다. 거기에서 제가 박중혼 역을 맡았죠. 그런데 상대인 최먼수가 제 3년 선배였습니다. 그러니까 혼나면서 연극을 했죠.

제가 몸담던 극단은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로 흥행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이 작품이 유명했는데 이름있는 상당수 여배우들이 이 극을 거쳐 갔죠. 저는 거기에서 스탭으로 일했습니다.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우지는 않았는지

대학은 97년도에 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시 최먼수 역할을 했던 분이 서울예전 선배입니다.
극단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한 선배가 “대학은 나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학연이 있으니까 어느 대학이던 연영과를 나와야만 한다고 조언해 줬습니다. 그래서 그 선배에게 물었죠. 선배는 어디 나오셨냐고, 그랬더니 우리 학교 그러니까 서울예전은 유명해서 저는 못 들어갈 거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그 학교를 입학했습니다.
제 동기가 김희원 배우, 배성우 배우, 뮤지컬 박건형, 이천희, 가수 마야 등등입니다. 그해 동기들이 워낙 끼가 많아서 그런지 많이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죠.

저는 연극을 오래 해서 연극계에서는 나름 이름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한계가 분명히 있죠. 제가 대중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것은 영화 곡성이 아니고 주말 드라마인 황금빛 내인생에서 부장역할을 하면서 부터입니다. 아주 작은 역할을 했지만, 고정이었기에 사람들이 알아보더군요. 우스갯소리지만, 그때 처음으로 ‘아~ 드라마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

세월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연극 생활하면서 결혼은 여전히 힘이 듭니다. 아직도 열정페이가 많이 있습니다. 바뀐 건 스탭 처우인데 노조가 생기면서 많은 부분 개선이 됐죠. 하지만 배우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43세에 결혼했죠. 그때가 곡성을 한참 찰영 중이었는데 제 부인도 연극을 했습니다. 후배인데요. 그 친구는 오리지널 연극배우고 연기를 참 잘합니다.
지금의 부인과 연애시절 싸워서 헤어진적이 있습니다. 뭐 그것도 결혼 때문에 그런 것인데. 저는 지금처럼 연애하면서 살자고 했고 지금 부인은 결혼은 해야한다. 이런 견해 차이 때문에 싸우고 헤어졌죠.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연극입니다. 제 친구와 후배, 제 부인될 사람 등이 햄릿 공연을 하는 데 제가 관람차 갔습니다. 그때 제 부인이 오필리어 역으로 나와 연기를 하는데. 참 예뻤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 공연을 본 선배가 술 한잔 사주는 게 전통이라 제가 술자리를 만들었죠. 자연히 그 술자리에 제 부인이 있었고요. 그런데 제 부인이 잠깐 밖에서 보자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나 때문에 온 건 아니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자존심인지 뭔지 몰라도 “그럼 아니지 우리 헤어졌잖아”라고 대답했죠. 그런데도 너무 예쁜거예요. 햄릿하고 독백하는 장면이 계속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다시 사귀자”
결정적으로 결혼하게 된 계기는 아내가 척추 분리증으로 힘들어할 때 였습니다. 걷기가 힘들정도로 아팠는데 제가 우리집에 와라, 아침, 점심 챙겨주고 수발을 다 들어주겠다 했죠. 그러다 어느 날 낮 공연하는데 챙겨준 밥을 안 먹는 거예요. 속도 상하고 그래서 “이럴 거면 가” 그랬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 모습을 보고서야 결혼해야겠다. 했습니다.  지금은 7살, 4살된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그때가 영화 곡성을 출연 때인데 “나는 이제 됐다. 결혼도 하고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리석은 생각이었죠.

연기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연극영화과 전공하면 본 이론서적에 나온 말이 ‘배우는 그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갑니다.
예전 유명 드라마를 기억하면 지금과 대화 표준어가 다릅니다. 다시 보면 어색합니다. 시대가 변한 것이죠. 하지만 배우들은 그걸 담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부장역할을 하면 당시 정치 성향을 알아야 그에 맞는 연기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러니까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고 정치 사회 경제를 알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그 시대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배우 손강국의 미래는?

저는 그냥 배우입니다. 서 있을 때까지 배우로 남고 싶습니다. 모든 배우의 희망입니다.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은 불투명합니다. 제가 후배들에게도 자주 묻습니다. “너 직업이 뭐야”라고요. 그 단순한 물음에 ‘음~ 배우죠’라며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배우가 아닙니다. 당당하게 배우라는 소리가 나오려면 자기 스스로 배우라고 인정하는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인고의 시간이기도 한데 저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더 노력해야 할 이유기도 하지요.

저는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서 있을 때까지 무대 앞에 카메라 앞에 서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지금 촬영하고 있는 넷플릭스의 ‘더글로리’와 제이티브이 ‘재벌집 막내아들’도 많이 사랑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배우는 삶의 진행형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삶의 진행형입니다. 끝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많은 응원과 관심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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