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여명 부상...358명 ‘범법자’로 / 외로움과 생계불안, 후유증 3중고

사람들은 지난해 부안을 전쟁터라고 불렀다. 새까맣게 떼지어 있다며 “까마귀”라는 소리를 들었던 중무장한 전경들은 서슬퍼런 방패로 맨손의 시위대를 밀치고 찍어댔다. 보다 못한 주위 상점에서는 빈병을 내 놓았고 골목 구석의 가스통도 저항의 도구로 사용됐다.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반핵대책위에서 추산하는 부상자는 600여명, 성모병원과 혜성병원에서 공식 절차에 따라 치료를 받은 주민이 360명에 달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다.
면 대책위 한 관계자는 “죽을 각오로 싸웠기 때문에 웬만한 상처는 그냥 참는 사람이 많았다”며 “지금도 그 때 다쳤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며칠 안보였다 하면 병원 갔다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설명했다.
부상자들이 몰렸던 성모병원의 이희옥 행정부원장도 “머리가 찢어져 피흘리고 와서는 금방 꼬매서 다시 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며 “병원 치료를 받고도 진료기록 없이 나간 사람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야말로 ‘야간 전시 병동’ 수준으로 병원이 돌아가고 주민들은 입원도 않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는 형국이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7월을 시작으로 구속자, 수배자도 급격하게 늘었다. 대부분 특수공무집행방해나 집시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42명이 구속됐고 97명이 불구속되는 등 모두 358명이 ‘범법자’라는 오명을 썼다.
하지만 피폐해진 주민들의 삶은 아무리 많은 수치를 들이댄다고 해도 실상을 말해주지 못한다.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수배 때문에 바로 앞에 있는 집을 몇 달이나 못가는 사람들, 열일 제쳐두고 조직을 위해 살림을 포기한 대책위 간부와 부안주민들, 이들의 가슴에는 무엇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상처가 깊이 새겨졌다.

후유증, 그리고 가난
김현수 씨(62?부안읍)는 마당 계단 앞에 줄지어 놓은 화분을 가꾸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다. 지난해 11월7일 방패에 맞아 중상을 입은 뒤로 대문 밖을 나설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그나마 저녁에 30분가량 동네를 걸어다니고 약을 타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것이 외부 활동의 전부다.
그가 이날 부상으로 얻은 병목은 모두 8가지에 달한다. 두개골 골절, 외상성 노지주막하 출혈, 출혈성 뇌 좌상, 두부타박상 및 이출혈 등 모두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 투성이다.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뇌가 크게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당시 혼수상태가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그가 죽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을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지난해 11월7일부터 12월26일까지 20일 동안 입원한 뒤에도 올해 1월 말께부터 2월초까지 다시 병원 신세를 졌다. 그래도 여전히 어지럼증과 구토증세를 호소하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김씨의 담당의사는 “앞으로도 반복적 치료를 해야 한다”며 “뇌를 다쳤기 때문에 언제 좋아진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장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문제는 한달에 한 번 산악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건강했던 몸이 망가지면서 어렵게 꾸려나가던 살림 역시 풍비박산 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치기 전에 살던 전셋집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주인이 도망가면서 떼어 먹는 바람에 월세로 바뀌었다. 20만원 안팎의 최저생계비를 받아 15만원가량의 월세를 내면 약값을 내기에도 빠듯한 셈이다. 아내가 한 달에 4번 정도 밭일을 나가서 벌어오곤 했지만 최근에는 몸져누우면서 이마저도 어렵게 됐다.
특히 외로움은 그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아파서 일을 못나가니 사람들 만날 일도 없고 만나서 할 말도 없으니까 안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요놈들이 봄에는 꽃이 참 크고 예뻐요. 그 때는 꽃이라도 보듬고 그랬는디, 다 시들어 버렸네요.” 김씨의 말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수배와 끝없는 저항
‘핵폐기장 아줌마’, 부안 주민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고 했다. 진서리에 사는 김선자 씨(48)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지난 5일 상경투쟁과 6~7일 삼보일배에 참여할 정도로 여전히 씩씩하게 투쟁하고 있지만 남모를 아픔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
지금도 비 오는 날이나 밤이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는 그는 내소사 사건으로 지난해 9월10일부터 40일 동안이나 수배 생활을 했다.
한 달 전에야 벌금 138만원을 내고 나서 불구속 상태가 종결됐다.
“처음에는 성당에도 못 갔어요. 친구네 집에서도 며칠 살다가 남의 집 다락방에 숨어 살기도 했어요. 내소사에서 지낸 적도 있는데 낮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혼자 등산을 다니는 거죠.” 다행히 며칠 지나 부안성당에 연락이 닿아 아침 밥, 빨래,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지냈다.
핵폐기장 유치 시도가 있기 전 운영하던 포장마차도 만신창이가 됐다. 핵폐기장이 그에게 3중고를 안겨준 것이다.
그래도 그는 “핵폐기장 문제는 부안 군민의 일”이라며 “할머니들, 할아버지들이 피 흘리면서 막아내고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명백한 백지화 선언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보상이 이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지름길인 셈이다./한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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