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광복과 통일 - 스러진 혁명의 꿈 - 지운 김철수 <3>

▲ 1989년 1월24일자 한겨레신문
흑하사변의 내막

이 상해파와 일크스크파의 분파적 대립은 결국 흑하사변을 일으키게 된다. 흑하사변은 1921년 상해고려공산당 창립 직후 6월28일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에프스크)에서 대한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이다.

1910년 한일합방 전후로 많은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위축되자 해외로 망명하거나 국경이 인접한 중국, 시베리아, 러시아 등지로 건너가 산발적인 무장독립운동을 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군은 러시아에서 철수하면서 당시 간도 일대에서 활동 중이던 반일 무장독립군 소탕에 나섰다. 일본군은 북간도에 북로 정서군과 남쪽에 서로 정서군을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에게 300여명이 사살당하고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부대에게 연대장을 포함 900여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다. 연이어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대한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고 이를 빌미로 간도의 한인촌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이에 각 방면의 독립군들은 전략상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 이만(달레네첸스크)으로 이동, 새로운 통합 대한독립군단을 만들게 된다. 약 3,500명 정도의 병력으로 각 부대별 중진들이 모두 참여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거주하던 일크스크파의 문창범은 이동휘와 상해 임시정부에 대립하여 별도로 조직한 국민회의와 의병대인 자유대대군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적군과 교섭하여 한인무장군들을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주선한다.

1921년 3월까지 간도지역의 최진동, 허욱 등의 총군부, 일크스크파인 안무의 국민회의군, 홍범도·이청천 부대, 김좌진 서일 등의 군정서군대, 그리고 러시아령에 있던 의병대로 이만 군대, 다반 군대, 이향 군대, 자유대대, 독립단군대가 소속부대별로 이동하여 자유시에 집결한 것이다.

그러나 각기 다른 계파의 한인무장독립군들을 집결시킴으로써 항일무장투쟁에 대군단을 갖추었지만 계파 간 주도권 쟁탈이 불거지고 있었다. 이때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이들 한인무장군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무장독립군들의 대부분은 무장투쟁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순수한 항일투사들로 임시정부 내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했던 이동휘를 지지하고 그의 추종자들이 자유시에 집결한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이 일크스크파로서는 불리한 상황으로 자파 세력 확장에 장애가 되었다. 그때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 부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군 통수권 문제로 갈등이 야기되었다. 자유대대는 일크스크파의 대한국민회의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이동휘의 상해파가 주류인 임시정부를 지지함으로써 종국에는 상해파와 일크스크파의 정면대결로 치달았다.

일크스크파는 자유시에 결집한 독립군들을 자파의 자유대대 휘하에 두고자 했으나 이항파가 당시 상해파가 장악하고 있던 극동공화국 한인부를 설득하여 이항군대를 비롯한 상해파 군대들을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 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무력군대를 두게 한 것이다. 이에 일크스크파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를 움직여 임시고려군정회의를 조직하고 군통수권을 다시 갖게 된다. 그리고 이에 반항하는 사할린의용대(이항군대, 총군부군대, 독립단군대, 다방군대, 국민군대, 이만군대)를 러시아공산당을 반대하는 백군파라고 거짓 고발한다.

일크스크파의 손을 들어준 러시아적군파는 사할린의용군의 무장해제를 명령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장갑차를 앞세워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교전했던 우리 독립군 1,500여명 중 600여명이 비참하게 사살당하거나 흑룡강에 빠져죽고 살아남은 864명 전원이 포로로 러시아 수용소에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홍범도는 포로로 잡혀갔고 총재였던 서일은 자결하였다.

흑하사변은 사할린의용대가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포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일크스크파의 분파투쟁이 불러일으킨 참상이었다. 지운은 이 참상에 대한 보고를 접하고 독립운동 대열 간의 극단적 분파 활동에 대한 분노와 심한 좌절감을 갖게 된다.

코민테른 금화 40만원을 관리하다 (고려공산당 재무담당 중앙위원)

조선 본토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4월13일 미국의 안창호, 이승만, 중국의 이시영, 이동영, 김구, 신채호, 신익희, 신규식, 시베리아의 이동휘 등이 내지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상해에서 망명정부인 민주공화정 형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당시 모스크바 주재 김규식을 파리 만국강화회담에 파견했다. 이때 일크스크파에서도 국민회의라는 조직을 만들어 따로 윤해를 파견했지만 현지에서 김규식에게 대표권을 양보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본회의 참석조차 못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당시 이동휘는 시베리아 일대에서 한인사회당 당수로 일정한 군사력을 갖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사회주의 건설에 진력한다는 명분으로 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했지만 안창호의 간청과 사회주의 운동보다 조국독립을 우선해야 한다는 김립, 김하구 등 당원들의 의견을 들어 상해로 내려와 국무총리에 취임한다.

이렇듯 임시정부는 각 계파가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지고 참여한 조직으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혼재돼 있었다. 얼마 안 가 계파 간 알력과 취약한 재정의 임시정부는 지속적 정부 활동의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임시정부 살림살이는 내지에서 조금씩 걷고 외국의 도움을 받아 겨우 연명하고 있었는데 만성 적자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정부 차원의 외국 차관 문제가 대두되어 의견이 분분하게 되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는 한인사회당 서기인 국무원 비서 김립, 재무차장 윤현진, 내무차장 이규형, 교통차장 김철 등이 실무를 맡고 있었다. 지운은 허헌을 통해 김립과 그리고 윤현진, 이규형, 김철과는 일찍이 신아동맹당 동지로 인간관계가 깊은 사이였다.

결국 국무총리 이동휘와 한인사회당 서기 김립이 입안하여 당시 친미파인 이시영 재무총장과 신익희 외무차장 몰래 재무차장 윤현진의 재량으로 국무총리 이동휘의 위임장을 줘서 한인사회당 간부 한형권을 모스크바 레닌에게 차관을 얻으러 보냈다.

한형권은 모스크바 주재 박진순과 함께 외무대신 치치령으로부터 무상원조 명목으로 금화 200만원을 받았고 그중 40만원만 금덩이로 바꿔 그 돈을 시베리아 독립군 조응순을 시켜 상해로 들여온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돈은 공산당에서 가져왔지만 돈을 임시정부 개조운동에 쓰고자 했다. 상해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최고 기관이었지만 허울만 정부였다. 그래서 임시정부를 집행위원제로 편제하여 상해에는 연락총본부만 두고 본부비용과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시베리아 이동휘, 북경 남형우, 신채호는 역사 편찬, 광동 신규식, 북만주 이동영, 이시영, 김동삼, 노백린은 사관학교 양성 등의 활동비에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간부 사이에 돈의 출처와 사용 용도에 대한 의견이 대립되었고 결국 안창호, 이시영, 신익희 등의 반대에 부딪쳐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돈이 점점 없어지자 한인사회당 서기 김립은 나머지 돈 18만원을 공산당 조직 건설에 쓰게 된다.

이 돈 중에 일부 김립의 돈이 허헌을 통해서 본토 사회당 조직 지원 명목으로 국내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해 7월 중국공산당 결성과 심지어 그해 10월 일본공산당 결성 지원 자금으로까지 흘러나갔고 의열단과 독립군 단체에까지 흘러나갔다.

이 시점에서 본토에서 상해로 나간 지운이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면서 북경에서 진독수, 모택동과 사상적, 인간적 동지관계를 맺게 된 것 같다. 결국 이 돈 문제 때문에 김립은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에게 총 맞아 죽게 되고 모스크바에서 20만원을 더 들여와 제멋대로 쓰는 한형권은 고려공산당에서 제명된다. 지운의 동지들이 김립을 죽이고 지운마저 죽이려는 김구를 죽이고자 했으나 지운은 독립운동 동지들끼리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고 간곡히 말린다.

이후부터 지운은 재무담당 중앙위원으로 이 돈을 관리하게 되었다.

고려공산당 베르후네진스크 연합대회 (1922년 9월~12월)

21년 4월 창립한 고려공산당은 이동휘를 대표로 박진순과 조선어학회 회장을 지낸 이극로를 통역으로 국제공산당 본부가 있는 모스크바로 파견한다. 하지만 일크스크파 공산당도 대표를 보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지운은 이동휘의 상해파와 일크스크파를 하나로 엮는데 노력하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상해파의 정강과 주장은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일본 제국주의를 먼저 몰아내고 민주주의 혁명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일크스크파는 상해파를 공산당과 관계없는 민족당이라 몰아붙이면서 당장 사회주의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국제공산당은 두 파를 모두 해산하고 각 파 네 명씩 연합간부회의를 만들어 이를 토대로 새로운 공산당 대회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22년 6월 상해파는 연합간부회의 대표로 이동휘, 김철수, 이봉수, 김동삼을 지명하였다. 지운은 연합간부 회의 기간 중 일크스크파의 방해공작과 40만원 자금 사용 내역 추구 등으로 온갖 고난과 목숨을 위협받아가면서 그해 10월 시베리아 베르후네진스크 연합대회를 성사시키고 중앙위원에 피선된다.

3개월여를 끌었던 연합대회에서 양 파는 현저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일크스크파는 끝내 탈퇴해버리고 상해파만 이동휘를 승인 요청하러 국제공산당에 보냈으나 국제당은 1923년 초 양 파 모두를 해체하고 재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두 파는 훗날 국민대표회의에서도 개조파와 창조파로 또다시 대립한다.

국민대표회의(1923년 1월~7월) 임시집행부 간부에 선임

상해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으로 이승만을 탄핵성토하고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 주요간부들이 사임하는 등 그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창호, 윤현진, 김철 등이 수습책으로 국민대표회의를 제안하였다. 그때 지운은 베르후네진스크 연합대회를 마치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장춘, 봉천을 거쳐 상해에 들어왔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부터 상해 교회 건물에서 열렸다. 이 국민대표회의에서 지운은 본토에 연락해 40여명(상해파의 지휘권에 있는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천도교 대표 등)의 대표단을 오게 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대회 임시집행부 간부로 안창호, 김동삼, 윤해, 배천택 등과 함께 선임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안창호와 지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로 갈려 그해 7월까지 싸움만 하다가 결론 없이 끝나게 된다. 이런 지루한 싸움 속에서 5월, 지운은 임시집행부 간부를 사임하고 항주로 내려간다. 당시 지운의 심경을 구술자료를 통해 보자.

“그때 내가 그냥 자살할 생각이여. ‘아무래도 희망이 없는 나라다. 민족이다’ 허고 그냥 자살 헐 생각이 일어났어. 내가 총 가지고 댕기는데 사람 쏘아 죽이고 내가 마지막으로 죽어버려. 그런 생각에... 극단으로 비관을 했어. 극도로 비관을 했어, 아이! 그리서 항주 가서 그때 있는데 두견이를 들으면 더 슬퍼서 그렸네, 그때”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