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옥고 치르며 구타와 물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부안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가 사망 64년만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1902년 주산면 돈계리 580번지에서 출생한 임종한(林鍾翰) 선생은 국가보훈처가 3·1절을 기념해 발표한 165명의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에 포함됐다. 선생은 그동안 후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익’계열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적을 온당히 평가받지 못했다.
선생은 줄포보통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福岡) 다나카(田中) 중학교에서 수학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귀국했다. 지난 8일 선생의 차남 용택 씨(78, 정읍시 상평동)는 “3,4대 국회의원을 지낸 부안 출신 신규식(申奎植) 씨가 유학시절 동문 수학생이었음을전해 와 알게 됐다”고 밝혔다. 선생은 귀국한 뒤 경성 YMCA에서 영어를 전공하며 독립운동의 틀을 다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종한 선생의 항일운동은 크게 민족·청년·노동 등 세 가지 방면에 걸쳐 왕성하게 전개됐다. 우선 1920년대 말 좌·우파를 망라한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의 활동이다. 선생은 1928년 3월25일 부안 초월관에서 신간회 부안지회 설립을 주관하고 부회장에 선출됐다. 선생의 신간회 부안 동지들로는 회장 신기익(辛基益)을 필두로 김태수(金泰秀), 신석갑(辛錫鉀), 김찬균(金?均), 신기인(辛基人), 임승화(林承化), 문병렬(文炳烈), 우재규(禹在奎), 김명진(金明振), 이재호(李在鎬), 백남기(白南祺), 임복래(林福來), 백종기(白鍾基)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선생의 청년운동은 1927년 10월30일 사회주의 계열의 뿌리를 가진 조선청년총연맹 전북연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선생은 이곳에서 정치부 임원으로 활동을 벌였다. 그는 일제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민족의 참정권, 집회결사 및 언론출판의 자유를 주장했다.
선생은 노동운동에도 열의를 보여 조선노동총연맹 부안합동노동조합을 결성해 조합장을 맡아 8시간 노동제 · 최저임금제 도입과 치안유지법 등 악법 철폐를 위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또한 백산노농회 활동에도 관여했다.
그 뒤 선생은 1928년 여름 서울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돼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됐고 고려공산청년단 단원임이 밝혀져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29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석방 뒤에도 일제에 맞선 저항운동의 뜻을 버리지 않았던 선생은 수 차례 해외 망명을 시도했다. 후손들은 사망한 장남 우택 씨를 함흥중학교에 전학시키고 선생의 호적상 이름을 개명한 일 등을 그 같은 시도의 일환으로 읽고 있다.
그러나 선생은 독립운동의 꿈을 품고 만주를 향하던 기차 안에서 일제에 검거돼 서울로 압송되고 말았다. 그 뒤 석방 후에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채 1941년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용택 씨는 “구타와 물 고문의 후유증이 심했다”고 회상했다. 용택 씨에 따르면 선생은 물 고문으로 인해 군산의 한 병원에서 축농증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선생이 사망한 뒤 경관들이 집에 들이닥쳐 선생의 서적을 불태웠던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한편 용택 씨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선생에 대한 공적 신청을 했으나 부적합 판정을 받은 바 있다고 밝혔다. 결국 지난해 11월 재신청으로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선생의 돈계리 생가에는 막내 아들 삼택 씨가 살고 있다.

서복원기자 bwsuh@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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