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생존을 지키기 위해 혼신 다하는 마지막 보루

ⓒ 홍성담

그제 오랜만에 눈이 제법 내렸다. 칙칙한 회색 건물들을 덮어버리는 하얀 눈은 더러 너무 내려 징글맞고 다니기 불편해도 올 때면 늘 반갑고 아름답기만 하다.

이 눈이 올 농사짓는 데 큰 보탬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고 등용리에 갔다. 360도 몸을 돌려 둘러보아도 인적이 거의 안 보이는 고요한 농촌 마을엔 아직 바람이 퍽 차가웠다. 힘주어 땅을 비벼보았다. 신발 밑창과 맞닿은 땅 밑을 느껴보고자 오감을 모아 보았다. 햇살에 눈이 녹고 있었지만 언 땅이 부드러워지기엔 조금 더 따뜻한 봄날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그 딱딱한 흙과 눈발 위로 새록새록 새싹들이 연초록 여린 잎을 삐죽거리며 올라오는 게 곳곳에 보였다. 허리 숙여 그 어린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참 예쁘구나. 장하다. 가슴이 뭉클한 게 용기가 생긴다. 용기? 앞으로 이곳 등용리에서 얼치기 새내기 농부의 꿈을 피워볼까? 그런데 과연 내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어쩔까? 그렇게 마음이 뒤숭숭해서 나는 지금 오나가나 확신과 용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 참이다.

핵폐기장이 부안에 들어오는 것에 가장 분노하며 유치반대 싸움에 앞장 선 사람들은 농민들이었다. 결국 빚잔치가 될지언정 땅을 놀리는 법이 없는 그들이 한 해 농사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며 그 일에 나섰다.

동학농민운동의 후예들답게 농민들은 참으로 장렬하게 핵폐기장이 들어오는 걸 막아 냈다. 옛날 미완의 농민혁명은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듯했다. 인간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생명의 농업을 일구는 농민들에게 죽음의 재인 핵쓰레기는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이겨 내야 할 존재였다. 핵폐기장 반대싸움의 현장마다 출렁이는 노랑깃발 사이사이로 마디마디 굵고 거친 손, 검게 그은 얼굴들이 넘쳐났다. 땅과 인간을 살리고 자연과 교감하는 성스러운 노동의 결실이요 증거인 그 주먹들은 분노로 떨었고 얼굴은 눈물로 덮였다.

그 와중에 부안농민들은 전북 장수의 농민 이경해 님이 멕시코 칸쿤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장 앞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반대를 외치며 자결한 소식까지 접해야했다. 생명과 생존을 지키기 위해선 자기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비극적 현실이 이 땅 농민들에겐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핸드폰을 팔고 텔레비전을 더 팔아야 나라가 부강하고 국민이 먹고 살 수 있으니 그러기 위해선 농민들이 좀 죽어줘야겠다는 강요는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깃발은 농악대가 모처럼 출현이나 해야 장식품처럼 볼 수 있다. 농사는 홀대받고 농사짓는 땅은 투기꾼들의 먹이감으로나 인기 있을 뿐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인디언 크리족 예언자가 했다는 말을 떠올리곤 한다. ‘...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뒤에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인간이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다시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짬짬이 눈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 속에 묻혀버린 농부의 꿈, 그래도 겨울 이기고 눈도 녹이며 다시금 농부의 의지가 피어나는 들판이다. 지금은 눈 덮여 안 보이지만 저 들판 어딘가엔 겨울 보리들이 너른 땅을 차지하곤 푸르고 씩씩하게 자라 있다. 그 춥고 얼어붙는 날들에도 보란 듯이 당당하게 피어올랐으니 그 자체로 눈부시게 희망차다.

생명농업에 대한 이해가 돈으로 저울질할 수 없는 가치와 철학의 문제이므로 오늘도 수많은 농부들이 자신들을 적자생존의 벼랑으로 내모는 슬픈 현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들판으로 나선다. 어떻게 하면 좋은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땅을 더욱 비옥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온 생명에게 이로운 농사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파괴와 단절, 물질지상주의와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농부들은 제 스스로 땅 밑에 누운 생명의 씨앗이다. 생명과 생존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마지막 보루이다. 결국 생명이 죽음을 이기고 봄이 겨울을 이겨 따뜻한 햇살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여기 부안농민들이 그 지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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