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사 일주문 앞에 지난 11월 22일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조계종 24교구 선운사 주최로 세워진 김재환(86ㆍ사진)씨의 ‘선운사 수호 공적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1950년 당시 고창경찰서 반암출장소에 재직했던 김재환 소장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이 야간에 선운사를 본거지로 삼자 선운사를 소각하라는 군의 명령을 거부, 소각작전을 철회시켜 우리 겨레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수호했던 정신을 기리고자 만들어졌다.

부안읍 서외리에 사는 김 옹은 진안 출생으로 전쟁 발발 직전 고창경찰서 반암출장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되고 그해 7월 동호출장소를 철수하여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전남으로 남하했지만 전북을 버리고 왔다는 다그침과 비난으로 환대받지 못했다.

그 당시 전라북도 경찰서장은 부산에서 집결하자며 이미 내 뺀 상황이었다. 지휘본부가 없어 몇 명만이 미군이 버린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전북 경찰청지휘본부를 대신하는 처지였다.

김 옹은 전북지휘본부를 찾아 구식 소총하나 메고 전남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진주, 부산으로 헤맸지만 그곳에서도 연락이 두절되어 찾을 수가 없었다.

갈 곳이 없어진 일행은 다시 전주로 돌아왔는데 시내는 너무나 평화롭고 조용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아군은 사태파악을 위해 실험적으로 총을 몇 발 발사하자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인민군의 탱크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고 폭격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겨우 전주를 빠져나와 경남 함양군 대진초등학교에 50여명이 자리를 잡아 전북 경찰본부를 설치했다. 그곳에서 적은 숫자로 할 수 있는 임무는 한정되어 미 8군 야포부대 관측병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어 9.28서울 수복이 되고, 그 해 10월 전북도 탈환하면서 다시 복귀하게 된다.

갈팡질팡하던 인민군 낙오자, 지방당원, 부역자 등의 빨치산들이 선운사 일대로 숨어들었고,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추위에 못 이겨 선운사 경내로 잠입했다.

당시 내장산에 주둔했던 8사단이 지원부대 1대대를 보내 경찰과 군인이 서로 손을 맞잡고 산을 훑어 들어가며 공비토벌작전을 합동으로 펼쳤고, 빨치산들의 은둔지로 선운사가 지목되자 ‘단위책임자 김대환이 책임지고 선운사를 불살라 버려라’는 명령이 8사단으로부터 내려왔다.

당시 고창경찰서 반암출장소장이었던 김 옹은 선운사 골짜기를 손바닥 보듯이 훤하게 꿰고 있어 그곳 지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산에 있는 빨치산 소탕은 시간문제 일 뿐이다. 고창의 보물인 천년고찰 선운사는 도저히 내손으로 불태울 수 없다”며 군의 명령을 복종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내 관할은 내가 지킬 테니 제발 선운사 소각작전만은 철회해 달라”며 군부대를 찾아 간곡히 부탁하여 3시간여 만에 설득해 군의 소각작전을 백지화시켰다.

그때 군은 사찰 건물 주변에 나무를 쌓아 놓는 등 소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며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회상했다. 김 옹은 여순반란사건 토벌작전에 참여하는 등 전투경험이 풍부하여 직원 통솔력이나 민간인통제 등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당시 전투 잘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나기도 했다.

이 사실은 김 옹이 지난 1963년부터 써온 일기형식의 자서전 <나의 일생>을 통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1993년 공개된 이 자서전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작성 돼 이 공로로 김 옹은 그해 고창문화원에서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그 후 부안에서 10여년을 재직했던 김 옹은 1961년 이리 역전 파출소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부안군지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대환 씨는 4남매를 출가시키고 부인 문길순(84)씨와 단란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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