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빼는 0이 낭와 못 만들겠어? 국수 못하는 0이 피나무 안반만 나무란다는 속담도 있다. 그러고 보면 옛 어른들은 요즘처럼 외식으로 별미를 쉽게 해결하기 보다는 집에서 국수나 낭와(국수에 팥을 넣음) 등을 여성의 손을 빌어 어렵게 만들어 먹은 모양이다.
일제 때 부안 본정통에 청요리(淸料理) 집 두 곳이 있었다. 이곳은 중국 화교가 운영하는 곳으로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출입이 어려웠다. 여기서는 일반 백성들은 입에 대기도 어려웠던 탕수육과 팔보채 독한 고량주 등을 팔았다. 청요리 집에서 파는 호빵은 돈 있는 초등학생들이 사먹었는데 겨울에 호호 불며 먹는 호빵이 아니라 오랑캐 호(胡)의 호빵으로 기억한다.
해방 후에 청요리 집은 중화요리 집으로 혹은 00반점으로 부르면서 대중적인 음식점으로 자리 잡았다. 70년대까지는 졸업식이나 생일 축하에 쉽게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음식이 중국집의 짜장이었다. 짜장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굵은 면발과 야채와 고기를 넣고 식용유와 함께 춘장을 넣어 볶은 양념, 다마내기라 부르는 양파를 춘장에 찍어 먹고 곁들여 먹는 단무지 아닌가.
16명의 여중학생들이 행사 끝에 선생님과 함께 중국집을 찾았다. 이 많은 학생들에게 뭔가 맛있는 것을 사줘야 할 텐데 걱정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짜장이다. 대개는 우짜라고 해서 우동 아니면 짜장인데 아무래도 짜장을 시키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이 젓가락에 면발을 든 재미있는 모습을 선생님이 사진에 담아 주었다. 70년대 중반이다.
오른쪽 맨 앞에 있는 학생 앞에 우동그릇이 커다랗게 놓여있고 숟가락에 밥을 듬뿍 떠서 왼손에 들고 있어 유난히 눈에 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방은 좁아터졌다. 여기에 놓인 상도 나무로 짜서 그저 튼튼하고 허물없다.
요즘에는 손짜장이니 옛날짜장이니 하는 이름으로 추억을 들추어낸다. 그런데 ‘자장면’이 표준어이자 바른 맞춤법이라고 하는데도 ‘짜장면’이라고 해야 더 맛이 있을 것 같은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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