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수’에서 ‘노래하는 싸움꾼’으로
“군민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반핵싸움에 동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에 익은 ‘영원한 군민의 노래, 반핵출정가’. 작년 7월 이후 싸움이 시작되면 어김 없이 기타를 메고 마이크를 잡으며 ‘무대’에 오르는 김병국씨(52세, 계화면 창북리)가 이 노래를 선창하는 주인공이다.

처음엔 차량홍보로 잡은 마이크가 촛불집회가 정착되면서 그의 두 손에 고정됐다. 집회에서 노래와 구호로 참여 열기를 만드는 사전행사와 마무리가 그의 몫이다. 행사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연사들의 주장과 발언이 오가는 본 집회가 ‘간주곡’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인지 김병국씨에게 노래는 단순한 오락거리나 짜투리 몸짓이 아니다.

“음악이나 예술이나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농민회 활동 하면서 깨달은 것이 노래의 가사 하나 하나가 민중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 자체의 의미가 소중합니다. 문화는 우리를 대변하는 정신 세계의 일부입니다.”

사실 그에게 ‘무대와 마이크’는 낯설지 않다. 80년대 중·후반의 농산물수입개방 반대투쟁과 민주화투쟁을 거쳐 92~93년에 부안군 농민회장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북도연맹 부위원장까지 지낸 농민운동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대중집회나 농민회 행사가 있으면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반핵투쟁에 앞장서고 무대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새롭고 유별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농민운동의 연장이고 그런 의미에서 노래는 자연스러운 싸움의 무기”인 셈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김병국씨에게도 노래가 무기가 아니라 ‘밥’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소시적 방황하던 청춘기’의 얘기다.

“기타를 처음 잡은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차츰 미군을 통해 전파된 트위스트, 캐롤송, 특히 록그룹 벤쳐스의 노래와 연주를 익히게 됐고 고등학교를 채 마치기 전에 고향을 떠나 ‘뺀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밤무대 직업‘카수’ 활동을 접고 부안으로 귀향한 것은 어려운 생계와 객지생활로 얻은 병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쉬로 내려왔던 것이 결국 눌러 살게 됐다”고 한다. 결국엔 고향 부안이 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얹어 준 셈이다. 당시가 20여년 전인 80년대 중반, 그가 30대 초반이었고 큰 아들 정태씨(21세, 한국농업전문대 3년)가 막 세상에 나왔을 때다.
열렬한 농민투사였던 그가 현재 반핵대책위를 이끌고 있는 농민회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열과 성을 쏟아 부은 일이 바로 유기농이다. 벌써 13년째 계화와 영암의 4만여평의 논에 거대한 유기농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존중의 신념과 유기농
“농업의 본질은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먹거리에 사람한테 해로운 농약을 치는 일은 비양심적인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해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기농에 대한 김병국씨의 신념은 단호하다. 수년간의 적자 경영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대규모 유기농은 계화에서는 그가 유일하며 부안에서도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한다. 유기농법이 그 만큼 손이 많이 갈 뿐 아니라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병해충이 농작물에 입히는 손실에 대해서도 그는 다른 생각을 품는다.

“곡식이 세상에 나오면 먼저 곤충들을 먹여야 하는 게 이치입니다. 농약을 치고 난 후 논에 살던 미꾸라지가 죽는 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이 넘은 그의 ‘우렁이 농법’은 인근 지역에 소문이 퍼져 지금은 ‘전문가’ 대접을 받고 있으며 여기 저기서 요청하는 강의와 교육도 그의 중요한 일과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유기농은 제초가 중요한데 현재까지는 동물 습성을 활용한 농법이 중심이었고 앞으로 미생물에 대한 연구가 더욱 발전하면 기술적으로는 유기농을 할 수 있는 여건은 많이 나아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농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반핵싸움 하면서 제일 아쉬운 것은 특히 올 여름에 군민들에게 유기농법에 대한 교육을 못한 겁니다.” 유기농법 ‘전도사’로서 그의 마음은 다급한 모양이다. 그래도 안도가 되는 일은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하는 장남 정태씨가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유기농에서나 반핵싸움에서나 그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변화’에 관심을 갖는다. 거대한 권력과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 그를 만나면 그의 말투나 생각에 베어 있는 투사의 풍모를 쉽게 느낄 수 있다.

180센티미터를 훌쩍 넘는 키에 깡마른 체구의 김병국씨. 그는 쉽게 꺾이지 않고 올곧게 뻗어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대나무를 닮은 농민투사다. 서복원 기자 bwsuh@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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