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심인택 옹

지난달 17일 한일회담 문서 공개로 양국 정부를 상대로 한 일제 치하 피해자와 유족들의 각종 소송이 예상되는 가운데 진실 규명과 피해배상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본보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부안군지회(회장 백석)의 협조를 받아 일제 때 강제 징용 피해 생존자 심인택 옹을 2회에 걸쳐 만나 당시 사회 분위기와 징용 과정, 피해와 저항, 요구 사항 등에 대해 들었다. 그는 징용노동에서 얻은 수은 중독으로 30살경부터 틀니를 끼기 시작했다. 더군다나‘쑤시고 아프고 저린 삭신’으로 40대에 이르러서는 농사마저 포기해야 했지만 여태껏 정확한 병명조차 알지 못한다. 올해로 84살을 맞이한 그는 하서면 청일리가 고향이며 현재는 부인 최순례 씨와 함께 읍내 봉덕리에 거주하고 있다. 인터뷰는 그의 자택에서 진행됐다.

-징용 이전 일제 치하를 떠올릴 때 가장 나쁜 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가을 추수때 식량 공출이다. 물론 놋 그릇 공출 같은 것도 있었다. 지나사변(중일전쟁) 이후, 그러니까 1930년대 말경부터 쌀을 중심으로 공출이 시작됐는데 군청 산업계 계통의 조선인·일본인 관리들이 담당했다. 공출된 쌀은 군량미 등의 목적으로 일본으로 보내졌다. 조선인들은 공출을 피하기 위해 나락을 둠벙(방죽) 속에 넣거나 심지어는 논바닥 밑에 숨기기도 했다. 관리들은 조를 짜서 다녔다. 당시 부안읍장이던 김동묵이가 기억에 남는다. 부하직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큰 길가로 다니면 그는 또 다른 샛길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공출을 피하기 위한 식량 반출을 잡아냈다. 그때는 면적당 생산량도 매우 적어 논 한 마지기당 쌀 수확량은 90kg들이 두 가마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부는 뺏기기도 하고 나머지는 감추기도 하면서 그렇게 먹고 살았다.

-학교에서 서당을 파교(破校)시킨 일이 있었다는데, 어떤 일이었습니까?
=학교 선생들이, 아이들이 학교를 안 다니고 서당만 다닌다며 서당 훈장 선생들을 학대하고 구타했다. 나는 15~6살 되던 해부터 열댓명의 학동들과 함께 천자, 추구, 사대소학 등을 50줄이었던 김내성 훈장 선생으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선생들이 들이닥쳐 훈장 선생 상투를 노끈으로 묶어서 머리째 천장에 매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일이 마을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훈장들도 가르칠 수 없게 되고 그때부터 서당은 점차 사라졌다. 대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거나 배움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학비도 비싼 데다 일정 때라 학교에 안 가려는 사람도 꽤 많았다. 학교를 통해 일본 정신을 심으려고 서당 파교를 한 것이다.

-강제 징용을 맞이할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징용 두 해 전인 1940년에 ‘대동아전쟁’이 터지고 1941년부터 강제 징병과 징용이 실시됐다. 전북에서는 당시 도지사 지대위라는 사람이 앞장서 일본을 향해‘내선일체(內鮮一體)’를 발표했다. 그 조선인 도지사가 식민 본국인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군대에 가야 한다며 징병제를 주도했다. 그리고 “1. 우리는 황국신민이 된다”(와레와 코우코 신민나리) 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일본에 바치며 암송해야 했다. 이때부터 21세 미만의 젊은이는 군대에 징집되고 21세 이상은 죄다 노무자로 끌려가야 했다.

또 하나 심각한 문제가‘처녀 공출’이다. 그게 요즘 말로 위안부(일본군 성노예)’다. 17세 이상의 미혼 처녀는 모두 공출해 간다고 했다. 그래서 딸 자식 가진 부모들은 그것을 피하려고 조건을 따지지 않고 딸을 시집 보내야 했다. 내 여동생인 심을림이도 공출을 당할 판이었는데 상서면 노적마을로 시집을 보내 겨우 모면했다. 그러나 곧바로 남편이 노무자로 징용되고 말았다.당시 부안에서도 분명 처녀 공출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친일 행각을 주도한 조선인들과 그들의 행위에 대해 언론에서는 제대로 다룬 적이 없었다.

-부안에서의 징용 경위와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다카무라’라는 회사 직원이 부안으로 파견돼 나왔다. 그가 군수, 면장, 구장들을 통해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모집해 데리고 갔다. 나하고 함께 간 사람들은 모두 36명이었는데 상서 출신이 제일 많았고 하서, 보안, 줄포에서도 끌려갔다. 당시 군대 징집병들은 제주도로 집결했고 우리 같은 징용 노무자들은 부산으로 가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후기차로 아오모리를 거쳐 탄광이나 공장 등 군수업체에 배속됐다.

결국 나는 1942년 12월, 22살의 나이로 일본 홋카이도의 한 수은광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일본 홋카이도(北海島) 수은광에서의 징용 생활은 어떠셨나요?
=그곳은 음력 8월 보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이듬해 4월이 돼서야 겨울이 끝나는 아주 추운 지방이다. 우리 부안 출신 36명 가운데 10명은 루베시베로 26명은 모토야마로 갔다. 그곳 주소와 회사 이름을 정확히 기억한다. 회사는 노무라 광업주식회사이며 홋카이도 ‘기다미고꾸 돗구로구니 루베시베’에 위치했다.

그런데 나는 하필 제일 무서운 곳이라고 하는 수은광에서 2년 3개월가량 일을 하게 됐다. 제아무리 항우 같은 몸을 가진 장사라 해도 이곳 제련소에서 두 달만 일하면 수은에 중독돼 손발이 떨리고 밥을 못 먹게 된다고 하는 곳이었다. 수은광 근처의 토양은 누렇게 변해 소나무 한 그루 살지 못했고 모기도 얼씬 거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기계부에서 토목건설부로 옮겨 다녔고 본래 건강한 체질이라 중독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은에 중독돼 죽은 사람도 있었고 귀국 직후 영문도 모른 채 앓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다.

월급은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다. 일본말을 잘 모르는 조선인에게는 욕설과 구타가 뒤따랐으며 숙소로 제공된 좁은 방에 5~6명이 기거해야 했다.

-회사의 부당한 대우와 차별에 대해 조선인들은 어떻게 맞섰습니까?
=한번은 회사에서 강제 적금을 월급에서 원천 징수해 조선인 300여명이 맞서 싸운 적이 있었다. 회사는 우리에게만 그런 조치를 취했다. 안 그래도 일본인의 절반 밖에 안되는 월급에 불만이 있던 차에 우리는 전원 출근하지 않으며 버텼고 공장 가동을 멈추게 했다. 며칠 후 경찰서장까지 나서 “대동아 전쟁을 이기려면 사정이 급한데 왜 일을 안하냐”고 다그쳤다. 하지만 우리는 “내선일체라고 하더니만 일본인과 차별하는 것은 물론이고 월급마저 제대로 주지 않아 조선의 부모형제가 살길이 막혔다”고 항의했다. 결국 회사는 잔여금을 지불했고 우리가 승리했다.

-귀국 후 수은 중독의 후유증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귀국 몇 년 뒤 신경이 모두 죽어 치아가 다 빠졌고 서른이 갓 넘은 젊은 나이부터 틀니를 껴야 했다. 그때부터 이미 만성 두통에 시달렸고 한마디로 신체 전체가 여러 통증으로 시달렸다. 제일 큰 고통은 60년 동안 어깨, 무릎, 발이 저리고 쑤셔 일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다. 수은은 한번 중독되면 낫기가 힘든가 보다. 마흔살이 되니 상태는 더욱 안 좋아져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됐고 논과 밭까지 다 팔았다. 현재는 중풍에 걸려 왼쪽 팔과 다리를 못 쓰고 있으며 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일본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식민지 피해 배상이 끝났다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 정부가 나서 해결해야 할 몫이 있다. 한일수교협상 당시 피해 보상금조로 받은 5억불로 포항제철을 만들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돈은 애초 우리 것이었다는 얘기다. 그 당시 우리에게 돌려주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분배해야 한다. 국가에서 적당히 둘러대며 마음대로 써 버린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 개인별 배상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만 해도 공탁금 문제가 있다. 공탁금이란 퇴직 적립금 등 월급에서 원천 공제하는 각종 적금이었다. 귀국할 때 그것을 받지 못했다. 당연히 돌려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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