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바다, 그 해양문화의 오늘을 말한다. 1

본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획취재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변산반도와 위도, 왕등도를 둘러싼 줄포만 등 ‘칠산바다’는 부안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많은 해양문화를 일궈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지구온난화, 영광원자력발전소로 인한 온배수 유출, 새만금사업으로 인한 갯벌의 상실과 환경의 급격한 변동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에 칠산바다의 해양문화 및 생태환경을 되짚어보는 현장 기획취재를 통해 바다의 삶을 역사-문화-지리-생태적으로 재구성해보았습니다. 총 4회에 걸쳐 싣습니다.

① 줄포만 바다는 과거의 영광인가?
② 칠산바다, 개양할미를 잠깨우다
③ 새만금방조제 앞바다의 오늘을 보다
④ 다시, 해양문화는 우리의 삶이다


진서면의 줄포만 바닷가. 자연해안은 사라지고 인공해안 방조제가 직선으로 뻗어있다.

근래 들어 ‘곰소만’으로 더 잘 알려진 줄포만 바다. 부안지역의 입장에서 보면 줄포만 바다는 새로운 해양문화의 삶이 요구된 격동적인 20세기 근대사의 물결을 타고 흥망성쇠한 줄포항 및 곰소항의 역사와 함께 오늘날에는 용도폐기의 위기에 처한 듯합니다.

바다라고 하는 것은 모름지기 풍부한 어획이 있고 갯살림이 든든해야 바다로서의 가치가 있어 왔습니다만, 고창쪽은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변산반도와 인접한 줄포만 바다는 전통적인 가치를 거의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물 때 줄포방조제에서 칠산바다를 향해 드넓게 열리는 갯벌을 바라보거나, 거꾸로 들물 때 격포의 궁항 앞바다에서 어선을 타고 줄포쪽으로 들어가다보면, 줄포만 바다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감동을 받습니다. 곰소사람들이 ‘곰소강’이라 부르는 커다란 갯골을 드러내거나 그 갯골을 숨기고 바다호수로 둔갑하는 하루 두 차례의 반복운동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자연의 순환이자 생태활동입니다.

곰소에서 격포 사이를 연결하는 해안도로 곳곳에 서 바라보는 바다-해안의 경관은 굳이 관광객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토착민들의 오랜 인문지리 역사를 설명해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좀더 가까이 밀착하여 해안선을 따라 답사해보면, 줄포만 바다는 해안가 사람들의 삶의 공간과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바다는 생산성을 잃어가고 있고 해안가 여기저기는 버려지고 있습니다. 버려지고 있다는 것은 자연상태로의 방치와는 다릅니다. 실컷 써먹다가 더 이상 써먹을 게 없으니 용도폐기한다는 것입니다.

진서면 작도마을이나 작당마을 해안가 바다가 그렇습니다. 작당마을 해안절벽의 숲 아래에는 폐선들이 감추어진 채 버려져 있습니다.

곰소포구 앞의 소멸해가는 등대

근대사 1세기 :
사포/후포→줄포→곰소→격포


줄포만은 지금은 부안군과 고창군으로 접해있습니다만, 17~18세기에는 변산반도를 낀 부안현, 흥덕현, 무장현(심원면), 고부군의 월경지(越境地, 고려·조선 시대 소속읍과 따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군현의 특수구역)인 부안면(현 고창군)으로 접해 있었습니다. 줄포만이 ‘고부만’이라고 불리우기도 한 것은 부안면이 고부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줄포만의 가장 안쪽 포구는 고창군 흥덕면의 사포입니다. 사포와 그 옆의 후포는 1920년대 이전에 흥성흥성한 대표 포구였습니다. 조선 정조 23년(1799)에 암행어사 유경은 정읍 등 인근지역의 전세(田稅)를 실어 나를만한 곳으로 사포를 꼽았습니다. 조선 말부터 1920년대까지 사포/후포는 일본인 상인, 한국인 객주, 미곡상인 등이 중심이 되어 어물과 미곡거래가 활발했습니다.

그러다 줄포항으로 밀려난 것은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사포/후포의 지역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인 객주가 독립단 의병에게 피살되자 신변의 불안을 느낀 다른 객주들이 줄포로 이동한 게 큰 이유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줄포항은 192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서해안 4대 항구로 융성했고,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군항으로 계획했던 곰소항이 폐기되다 이후 1961년에서 1987년 사이에 줄포항의 대체어항으로 발전하였으나 1988년 이후 격포항에 그 자리를 내줬습니다.

사포/후포→줄포→곰소→격포로의 줄포만 중심지 변화는 근대사 1세기를 헤쳐온 역사적 격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포/후포 이후의 포구 발흥은 1883년 인천개항 이후 일본 어민의 한해통어(韓海通漁)가 합법화된 이후와 깊은 시기적 관련이 있으며, 일본인을 포함해 객주자본의 진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근대에 줄포항이 크게 발흥했던 것은 미곡반출이라는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시기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줄포가 어항으로 크게 발전한 것은 줄포만과 위도의 조기잡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줄포만의 조기 울음소리는 잊혀지지 않을뿐더러 위도 파시와 연결하여 줄포항이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줄포만 갯벌들은 양어장으로 변했다. 양어장에 먹이를 주기 위해 갯골에서 잡아온 새우를 갈고 있다.

자염과 젓갈, 그리고 옹기점

그러나 줄포만 주변은 포구와 그 취락형태로서만이 아니라 또다른 해양문화가 발달했었습니다. 해방 이후 곰소항이 형성되면서 제방 내부로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대규모로 개발되어 오늘날의 곰소젓갈이 탄생한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만, 줄포만 연안은 넓은 갯벌을 근간으로 전통적으로 자염업(煮鹽業)이 발달한 바 있습니다.

줄포만 연안의 자염은 무장현 검당(현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시기는 6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18~19세기에는 도처에 염장(鹽場)이 들어섭니다. 부안지역만 하더라도 보안면 영전, 신복리에서 신활리 사이, 진서면 진서리 등지에 염장이 존재했으며, 지금은 다 간척지 논입니다. 근대 들어 자염은 천일염에 의해 대체되었으나 1950년대 전반까지도 유지된 곳도 있습니다.

줄포만의 자염 생산은 지형, 기후, 식생 등의 자연조건을 고려하고 넓은 갯벌을 자연 그대로 이용하는 염전법을 취하였으며, 농경지를 경작하는 것과 유사한 과정으로 재래 농기구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약간의 변형을 가하는 등 농경문화와 공통된 해양문화를 이루어왔습니다. 자염도구로 가래, 쟁기, 써레, 나레, 들것, 작살 및 홈통, 맞두레, 물지게 및 물통, 수채, 물틀, 당그레, 바가지, 삼태기, 되, 함지(소량 운반용구), 섬(포장용기) 따위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염전이 있으니 젓갈 역시 특산물로 생산되었습니다. 줄포만의 어선들은 줄포만 바다나 칠산바다로 출어할 때 항아리와 소금을 싣고 나가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 어획한 선어를 선상에서 곧바로 염장처리하다보니 자연 젓갈업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곰소젓갈이 최근 유명해지기 이전, 1960년대까지는 줄포의 젓갈이 명성을 날렸습니다. 젓갈을 담글 때나 보관할 때는 젓독이 필수적인 바, 보안면의 외포에는 옹기점이 있어 여기서 제작된 젓독들은 줄포항의 선주와 객주들에게 팔려나갔습니다. 조기파시가 열리는 봄철이 가장 바쁜 시기라 파시때를 맞추어 젓독을 판다는 뜻에서‘파시를 쓴다’라는 관용어가 소통되기도 했습니다.

줄포만의 해양문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들물 때는 어염상선, 조선(漕船), 경강선(京江船, 세곡 운반배), 지토선(地土船, 토착민 배) 따위들이 드나들어 예로부터 ‘수로요해방수지지(水路要害防守之地)’로 인식되었고, 날물 때는 어전어업, 게와 조개 잡이 따위들이 성행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칠산의 모든 바다들이 어전을 가장 많이 세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간적으로는 줄포와 곰소를 넘어 모항과 궁항 등 줄포만 전체에 걸친 해안지대들에서는 취락구조나 생활사 혹은 물질문명, 언어, 제의에 이르기까지 삶 자체로서의 해양문화가 풍부하게 발달해왔었습니다.

줄포만 바다와 20세기의 옛 포구들

경관지형과 해안선

이제 이 모든 것들은 과거의 영광이었나봅니다. 줄포만 바다와 그 해양문화는 점점 더 우리네 삶의 주름들로부터 멀어지는 듯 사라지고 있으며, 다만 자연이 선물해준 경관지형으로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경관지형마저도 방조제와 같은 경직된 인공해안의 축조나 포구의 난개발로 심하게 왜곡되고 있습니다.

산 능선에서 바다를 바라볼 때는 간척지가 황금벌판으로 물들어 있어 그나마 풍요로움의 위안이 들지만, 바다 가운데에서 어선을 타고 과거 만입된 곳들을 바라볼 때는 꾸불꾸불해야 할 해안지형은 보이지 않고 돌과 콘크리트로 단단히 틀어막은 직선화된 방조제 호안만 보일 뿐입니다.

자고로 천부(天府)라 불렸던 변산의 지형들로부터 뻗쳐나와 굽이굽이 휘어진 해안의 흐름들마저 거의 없어진 오늘의 줄포만, 그럼에도 그 바다-해안공간은 새로운 해양문화를 창조하는 장소들로서 거듭날 수 없을까요?

글=고길섶(기획취재 팀장)
사진 및 자문=허철희(부안생태문화활력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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