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세월 속에는 서울에서 유행하는 패션이 부안에서 유행하기까지에는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행이 거의 동시에 간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기 시작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매스컴과 자주 접하게 된 것, 특히 텔레비전을 누구나 갖게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정 붙일 시간도 주지 않고 빠르게 달려가는 세월, 재래시장의 한 복판에 서서 잠시 옛 생각에 잠겨본다. 겨울이면 생선전, 채소전, 의류전, 포목전, 건어물전 등 점포의 벽도 없이 물건을 내놓고 파는 대부분의 상인들은 가게 밖에 연탄불을 내어 놓고 의자에 앉아 불을 쬐며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매일 매일의 일과였다. 누가 어디가 아프다던지 누구 자녀가 상을 받고 누가 속을 썩인다던지 숨김없이 얘기하고 조언도 해주며 세상이야기를 나누던 장소였다. 아침, 저녁 인사를 나누며 속 깊은 사정까지 터놓고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정을 쌓아가던 이웃들이었다. 누가 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말리던 사람이 호주머니 털어 막걸리 사놓고 화해시키도 했다. 그러면 “대들어서 잘못했습니다.” “내가 너무 과했네.” 이러며 금방 풀고 다음 날 다시 풋풋한 정을 나눴던 재래시장이었다.

맛없는 음식도 같이 나누면서 맛있게 먹어주던 이웃들. 음식 그릇을 통째로 놓고 누가 손을 씻었든 안 씻었든 신경 안 쓰던 시절. 위생적이냐 비위생적이냐를 따지지 않던 시절 오로지 깊고 두터운 이웃 간의 정만으로 모든 것을 덮으며 살았던 시절. 출출한 시간이면 단골손님과 함께 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을 하면서 너털웃음으로 고단함과 시름을 덜어내던 사람들이었다. 삶에 지쳐 마음이 허탈해지고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 그들을 보면 힘이 솟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도 바뀌고 우리의 생활도 주변도 서서히 바뀌어 갔다. 나이 드신 분들은 하나 둘 시장을 떠나갔고 서서히 젊은이들이 그 뒤를 이어 장사를 했다. 문화생활의 변화와 함께 가게마다 전기장판이 깔리고 텔레비전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더 이상 밖에 나가서 서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무료하지 않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내 가게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손님이 오면 물건을 팔고 손님들과 가게 안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면 그만이다. 대화가 줄어 오해가 쌓이기도 하고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도 시장은 여전히 활기차다. 서서히 젊은이들로 바뀌어 가면서 더욱더 활기차게 발전해 갈 것이다.

남에게 아쉬운 말 안 해도 살 수 있는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 애사든 경사든 돈만 있으면 다 치를 수 있는 세상, 옛날에 비하면 너무나도 편리하고 깨끗해진 가정집,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는 문화생활, 잘 다듬어진 거리와 공원, 도로를 가득 메운 자가용, 숫하게 넘쳐나는 멋쟁이들… 이처럼 모든 것이 편리한 세상에 살면서 왜 나는 힘들고 가난했던 옛 시절이 그리워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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