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활성화를 위해 매창별곡 연작에 이어 반계 유형원에 관한 글 ‘우반동의 꿈’을 4 차례에 걸쳐 보내드립니다. <편집자 드림>

글 싣는 순서
1. 실학 사상의 새벽을 연 반계 유형원
2. 반계수록의 산실인 신비의 땅 우반동
3. 반계수록에 실린 개혁 사상 (상)
4. 반계수록에 실린 개혁 사상 (하)


반계수록(磻溪隨錄) 번역본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 간행본과 충남대학교 고전연역회총서(古典演譯會叢書)로 나온 한장경 박사의 번역본 등이 있는데 필자는 후자를 참고하였다.

반계 유형원 영정(그림 이양원 동덕여대 교수).

조선사상사의 르네상스를 열다 - 실학의 태동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저 <역사의 한 연구>에서 역사란 도전과 응전에 대한 기록이라고 했다.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시대와 사상가의 관계는 사상가가 시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선각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말하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소가 살던 그 시대의 지적 분위기가 루소로 하여금 사회계약론을 쓰게 했다. 따라서 사상가는 시대의 산물이지 시대가 사상가의 산물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존재는 죽거나 묻혀지고, 현실의 벽에 막혀 은둔상태에서 자기 사상을 저술하는 것이 고작이다.

조선조에 있어서도 현실을 개혁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의지는 전통과 기득권에 집착한 보수주의자들의 저항에 부딪혀 패배로 귀결되어졌다. 여러 개혁사상가들이 비참하게 죽거나 은둔생활 속에 저술활동으로 현실에 대한 미약한 반발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 개혁에 대한 성공과 실패의 가늠자는 그 방향성과 깊이 그리고 속도와 방법 등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여기서 조선후기의 사상적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 고려시대를 지배한 사상은 불교이고 조선시대를 지배한 것은 주자학(성리학)이다. 이 유교적 문화유산의 정수는 바로 역(易)의 논리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를 아무리 독립적인 입장에서 이해한다 할지라도 중국문화권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역(易)의 본질은 중국 개혁사상으로서 우주의 지속적인 변화를 전제한다. 거기에 이원론적 입장에서 우주질서를 대립적 존재보다는 조화의 과정으로 보며, 인간은 그러한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의 이원론은 평등개념은 아니다. 이러한 역의 논리가 조선조 개국명분인 역성(易姓)혁명론으로 실현되고 조선조를 받쳐주는 근간이론이 된다. 즉 창업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며 정의로운 사명이므로 개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학은 너무 예(禮)에 치우쳐 탁상공론의 담론으로 흘러 비생산적 당쟁을 낳는 필연적 조건을 안고 있었다. 조선조, 이러한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서 중종 때 조광조의 개혁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주자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명리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현실과 이상의 괴리, 무조건적인 공맹의 논리 그리고 경륜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개혁은 37세의 나이에 저자거리에서 육신이 찢기는 비극적 종말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이어 선조대인 1589년, 정여립-"조선의 크롬웰이라 불리는 그는 ‘왕도 백성이 뽑자’라고 주장하며 왕정의 비생산성과 비합리성을 타파하고자 했다"-과 허균 등도 시대적 관념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고려를 뛰어넘는 개혁 의지가 주역(周易)이었고 이 역의 논리가 홀씨가 되어 조선개국의 명분을 제공했지만, 가치배분이 불공평했기 때문에 지배계층에겐 역성혁명, 민중에겐 점이나 택일 등 무속적인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역(易)의 논리를 넘어서는 17세기 중반 한국 조선사상사에 르네상스를 연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이 등장하는 것이다.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국조 이래로 시무를 알았던 분으로는 오직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 선생 두 분이 있을 뿐이다. 율곡의 주장 태반이 시행할만하고 반계의 주장은 그 근원이 궁구하고 일체를 새롭게 하여 왕정에 시초를 삼으려 했다”고 하면서 반계 유형원을 탁월한 경세가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고향의 아들에게 유형원의 저서 <반계수록>을 읽을 것을 간곡히 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계의 성곽이론을 응용하여 수원화성을 쌓았고,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당대의 경세가로 반계 유형원을 주목했다. 위당 정인보는 조선후기 실학의 제 일조(祖)가 반계 유형원, 제 이조가 성호 이익, 제 삼조가 다산 정약용이라 규정했다. 다산 정약용은 반계 유형원을 회고하기를 “정성스럽고 간절하다던 경세의 뜻, 홀로 반계 선생께 보겠네”라고 썼다.

후세의 학자들이 이와 같이 평가한 조선의 개혁가이자 사상가인 반계 유형원! 그가 저술한 반계수록을 통해 토지, 교육, 과거, 관직 제도 등 시대 고민을 배경삼아 치밀하게 사회경제 문제를 고민하고 대책을 제시했던 사람, 반계 유형원! 스스로 쓴 발문(跋文)에서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현실을 강조하고 과거 위주의 공부보다는 실제 현실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고자 했던 사람. 훗날 반계 유형원의 꿈과 개혁안은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을 거쳐 개화파까지 전승되었고, 시폐(時弊)에 대한 지적은 갑오경장의 지표로, 토지에 대한 개혁안은 갑오농민 혁명으로, 이후 3백년 동안 조선후기 사상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반계수록>(왼쪽). 식수 및 농사에 사용하기 위하여 1666년 봄 선생이 파신 큰샘비(오른쪽).

반계 유형원, 삶의 족적을 따라서

유형원은 조선중기의 중농주의 학자이자 실학자이다. 본관은 문화, 자는 덕부, 호는 반계이다. 서울 정릉 외가에서 출생했고 2세 때 북인이었던 부친 유흠은 28세 나이로 광해군 복위 모의사건인 어유당 유목인의 모사에 연루되어 장살되었다. 5세 때 외숙 이원진(유형원의 어머니는 참찬을 지낸 여주 이씨 이지완의 따님이다)과 고모부 김세렴에게 글을 배웠다. 외숙 이원진은 성호 이익의 당숙으로 하멜 표류사건 당시 제주 목사로 있었고 고모부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 감사를 역임하고 대사헌까지 지낸 고관대작이다. 일찌기 부친을 여의었지만 조부 유성민(정랑, 참판을 지냄)의 보살핌 아래 명문사대부 가문의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인척들의 지도로 학문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15세 되던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을 피해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 갔고 다음 해에 양평 땅 지평(砥平) 화곡리로 이사하였다. 18세에 영의정 심수경의 증손녀와 결혼했고 다시 이듬해인 22세 때 경기도 여주 백양동으로 이사가 살았다. 함경감사로 나간 고모부 김세렴을 찾아가 함경도 일대를 유람했고 얼마 뒤 그가 평양감사로 전출되자 평안도 일대를 여행하면서 역사적인 옛터와 국토를 유람했다. 23세에 조모상을 치루고 27세에 모친상을 치루는 가운데, 명이 완전히 쇠하고 청이득세한 정세 속에서 경상도를 여행하였고, 29세에 충청도를 여행하는 한편 30세 때에 처음으로 금강산에 올랐다.

조부의 명령에 따라 한 두 차례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한 채 조부 유성민이 세상을 떠난다. 그는 연이어 9년 상을 치룬 가운데 31세 <반계수록>의 초안을 잡고 32세 때에(1653년 효종 4년)에 조부의 농장이 있던 보안현 우반동에 내려온다. 우반동의 대부분 땅은 그의 9대조 유관이 세종대왕에게 받은 사패지였다고 전해지나, 그 당시 부안땅에 왕이 하사한 사패지는 없었고 아마 어떤 연유로 그의 조상들이 사적으로 취득했던 것 같다.

낙향한 그는 반계서당에서 글을 읽고 책을 쓰면서 때때로 서울과 지방을 여행했는데 이는 세상을 제대로 읽으려는 그의 노력이었다. 그는 31세에 시작해 49세 까지 19년 간에 걸쳐 반계서당에서 조선 최고의 명저인 <반계수록>을 집필하게 된다.

33세, 34세 연이어 상경해 진사시에 응시했고, 35세에는 <여지지(與地誌)>라는 지리책을 저술하였고, 36세 호남지방 여행, 38세 정동직, 배상유 등 학자들과 성리학에 관한 토론을 통해서 그의 철학을 정립했다. 38세 또다시 호남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풍토와 문물에 대해 두루 살피고, 39세 딸을 시집보내러 서울에 왔고, 40세 영남지방을 두루 여행했다. 41세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나라를 부국강병할 방책인 <중흥위략(中興偉略)>이란 책을 저술했으나 미완성이었고, 효종대왕의 북벌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안을 실전에 옮기고자 우반동 벌판에 준마를 기르고 마을사람들에게 좋은 활과 조총을 마련해 주며 말을 타고 하루 3백리 달리기 연습을 하는 등 군사 훈련을 시켰다고 전해지나, 이 또한 중앙집권적 왕조체제 하에서 자칫하면 역모에 휘몰릴 수 있어 중앙의 허락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하나의 설일 수 밖에 없다.

그는 45세에 외숙이자 스승인 이원진의 장례 참석차 서울에 왔고 근기학파의 영수인 미수 허목 선생을 뵈러 연천에 갔다. 그것은 1665년의 일로, 71세의 대학자 허목과 44세 반계의 만남은 근기학파와 실학파의 첫 만남이자 연결점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허목 선생은 반계가 임금을 도와 나라를 중흥시킬 수 있는 인재임을 칭찬하였고 세상을 개혁할 뜻에 의견이 모아졌다.

다음 해에도 그는 연천을 찾았고, 49세 1670년에 마침내 <반계수록> 26권 13책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책이 미쳐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채 52세인 1673년 3월 19일 새벽 아까운 나이로 우반동 반계서당에서 눈을 감는다.

조선 후기 사회가 낳은 개혁사상가-꿈과 좌절 속에서

그러면 실학의 창시자이자 조선의 개혁사상가인 반계 유형원을 낳게 했던 조선의 17세기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1592년(임진왜란) 1598년(정유재란)에 걸친 7년간의 임진대전쟁 그리고 1627년(정묘호란) 1636년(병자호란) 인조가 청 태종에게 맨발로 무릎 꿇고 3배를 올린 삼전도의 굴욕 등 50여년 간의 전쟁은 조선을 황폐화시켰다.

조선조 봉건지배 하에서 백성들은 소위 입안(立案), 궁방전(宮房田), 둔전(屯田) 등 전국의 토지가 왕실, 국가기관, 서원, 중앙귀족 대관들 심지어 지방 양반 관리들에게 대부분 점유되어, 정작 농민들은 경작해야 할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노비로 전락하였다.

봉건국가의 통치는 전세(田稅)를 비롯 가렴 잡세의 명목은 수십 종이고, 그나마 양인 농민들도 막대한 군포(軍布)의 부담 속에서 수탈과 병란을 겪어야 했다. 국가는 아무런 대책 마련도 못하고,지도층은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반계는 그의 저서 <반계수록> 발문(跋文)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과거를 보아 출세를 하고, 현행 악습들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 확신하며, 벼슬을 하지 않은 양반들은 혹 독선주의의 도덕을 운운하기는 하나, 국가사회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정치는 날로 어지러워지고 백성의 생활은 날로 파탄되어가고 있다.” 반계 유형원! 이 모순된 사회체제와 상황에 증오와 분노로 떨면서도 기존의 사회체제의 벽을 넘을 수 없는 좌절감에 빠진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행동할 수 없는 지성, 그는 그것의 한계를 느끼고 수 만 권의 장서와 함께 우반동으로 내려온다.

글=김경민(본보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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