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을 상대로 이긴 부안항쟁의 성공 요인으로 많은 이들이 ‘초기 여론전의 승리’를 꼽는다.
김종규 군수와 김형인 당시 군의장이 예상을 뒤엎고 지난해 7월14일 핵폐기장 유치신청서를 산자부에 제출하자 주민들 사이에 분노와 배신감이 급속히 확산됐다. 이후 7월15일 핵폐기장 반대집회를 시작해 22일에는 1만여 명이 모이는 반대집회를 개최하는 등 한 달도 채 되지않아 반핵여론이 지역 곳곳으로 깊숙히 파고들었다. 초기 여론전은 교육과 홍보가 적재적소에 함께 이뤄지면서 지역주민들 여론은 급속히 반전되기 시작한다.

“읍내 상권 여론을 잡아라”
초창기 여론전은 읍내 상권을 중심으로 선전전을 펼쳤다. 시장 여론이 어떠냐에 따라 부안전체 여론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가가호호 유인물을 돌렸다. 핵폐기장 부지 선정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당할 수도 있었던 격포나 진서 같은 곳은 지역대책위가 초창기부터 활발히 움직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 서로가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홍보전에서도 수월했다. 그러나 읍내 지역은 읍대책위가 꾸려졌지만 여론을 반전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7월초 읍지역 여론전을 주도한 이들은 변산의 ‘한울 공동체’ 가 중심이 됐고, 군청 앞에서 천막농성이 시작되면서 그 자리에서 홍보단이 구성되기도 했다. 이들은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가게마다 들어가서 선전전을 펼쳤다.
당시 선전전은 대자보나 유인물, 현수막, 만장 등이 중심이었다. 유인물의 내용은 주로 자치단체장이 단독으로 지역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핵폐기장을 유치 신청했던 비민주성에 대한 내용이 중심이었고, 강현욱, 김종규, 김형인, 윤진식, 김두관 등 부안5적을 설정하기도 했다.

“영광지역과 환경단체에서 핵교육 수혈”
선전전과 동시에 교육도 활발히 이뤄졌다. 대책위 교육국장의 역할을 맡았던 조태경씨는 ‘핵’의 본질을 전달하기 위해 일본의 반핵전문가 타까기 진자부로오의 책을 번역한 김원식 교수나 대안에너지센터 대표를 맡고 있는 이필렬 교수 등 외부 전문가들을 섭외했다. 또한 반핵국민행동과 영광반핵대책위 활동가들이 부안으로 와서 상시적으로 반핵교육을 펼쳤다. 반핵국민행동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양이원영씨와 영광대책위의 김성근(공동의장 겸 집행위원장)교무와 김용국(대외협력국장)씨 등이 주민 교육을 맡았다. 양이원영씨의 경우 촛불집회나 지역의 작은 모임 등을 찾아다니면서 핵문제가 우리나라 에너지정책과 역사, 국제 관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설명했다. 내용이 어렵다 보니 주민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최대한 풀어서 설명하는 게 그녀의 역할이었다. 김성근 교무를 비롯한 영광대책위 활동가들은 주로 읍면지역을 돌면서 주민교육과 함께 차량방송을 병행했다. 특히 핵발전소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보니 80년대 말부터 누적된 투쟁의 경험들을 지역사정에 맞게 풀어냈다.

과잉진압의 악수가 여론 승리
7월22일 경찰의 과잉진압은 이미 여론전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조태경씨는 “7월22일을 계기로 무슨 교육을 하더라도 주민들이 관심과 열정을 갖기 시작했고, 찬성쪽이 수백억의 물량공세를 했어도 주민들은 빈틈이 없었다”며 “부모형제, 이웃이 경찰폭력에 수없이 부상을 입던 상황은 반핵여론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또한 대책위 교육홍보 국장 김효중씨도 “당시 찬핵진영이 악수(惡水)들을 많이 뒀다. 내소사 사건도 결과적으로 부안의 상황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하에 악수를 둔 꼴 이었다”면서 “핵폐기장 부지선정 과정의 비민주성에 대해 분노한 주민들을 더욱 단결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교육을 통해 ‘핵박사’로 거듭나기
이러한 교육 홍보활동이 그전에는 간헐적으로 진행됐지만 본격적인 체계를 잡기 시작한 것은 7월 26일 이후부터였다. 대중집회로 촛불집회가 이뤄지고 부안에서 자체적인 핵전문가 양성교육도 시작됐다. 당시 교육국장을 담당했던 조태경씨가 주로 강연 기획안을 짜고 강사를 섭외해 약 45명 정도를 배출해냈다. 이렇게 양성된 반핵 선전가들은 마을이나 부녀회, 조기축구회 등 각종 친목모임의 요청이 있을 경우 찾아가 교육활동을 펼쳤다. 교육활동에도 노인층과 아이들을 위한 핵교육을 차별화시켜 대상에 맞게 진행했다. 주민들이 핵에 대해 반복적으로 학습을 하다보니 나중에 ‘핵박사가 됐다. 조태경씨는 “어르신들도 핵마피아나 양성자가속기 등의 생소한 말들도 다 소화 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어르신들을 위해 언어선택에도 좀더 신경써야겠다는 것을 교육하는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밝혔다.

영광은 부안의 미래를 보는 것
7월말부터 영광 견학이 진행됐다. 영광 대책위의 제안으로 시작된 영광견학에 참여한 주민들은 어림잡아 7천여명 이다. 영광 현지 견학은 핵발전소 전시관만 둘러보는 것이 주가 아니었다. 영광군 홍롱읍 성산리 마을→핵발전소 전시관→개마항→가마미 해수욕장을 거쳐 부안에 도착하는 코스를 통해 주민들은 ‘폐촌’이 된 삶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특히 이미 사전교육을 받았던 터라 ‘핵의 안전성’을 설명하는 직원들에게 주민들이 오히려 왜 핵발전소나 핵폐기장이 위험한지에 대해 설명해 당황스럽게 만들곤 했다. 김효중 국장은 “한수원 직원들의 사택을 지나는데 대부분의 사택들이 비어 있었다. 부안 주민들의 영광 견학이 이어지자 갑자기 빈집에다 페인트칠을 하고, 한수원 사택에 아이들 자전거를 갖다 놓기도 했다. 한수원 본사가 부안에 들어온다 해도 지역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영광견학은 바로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부안의 미래가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 가장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반핵’의 교육홍보 매체들 등장
교육홍보 활동이 체계성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여론매체들이 등장했다. 군청앞에서 시작된 촛불집회는 2.14 주민투표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려 주민들의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초창기 유인물은 ‘핵없는 세상’이라는 소식지로 발전해 지난 1일 승리대회때까지 총 65호가 발간됐다. 터미널이나 농협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대자보를 통해 부안항쟁의 소식을 전달했다. 군대책위는 물론 지역대책위까지 방송차량 홍보팀이 꾸려지는가 하면 아줌마 홍보단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읍면별 마을회관에서 상영된 핵관련 비디오 역시 시청각매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상팀 역시 부안항쟁의 현장을 그대로 전달해 기존 주류 언론매체가 주민들의 폭력성만 부곽시켰던 상황속에서 지역 밖으로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이러한 모든 매체들을 망라한 교육홍보전은 부안의 승리를 사실상 선언했던 2.14 주민투표에 가서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이향미 기자 isonghm@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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