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지도 상으로만 나타나 있는 '가야포' 마을

청호저수지. 저수지 넘어 창북리가 보인다.

이번에는 먼 고대의 역사 속으로 상상 여행을 해보겠습니다. 우리 부안에는 옛 지도상으로만 나타나 있고 오늘날에는 그 어떠한 흔적도 없는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야포(加耶浦) 마을입니다. 가야포라는 지명은 <대동여지도>로 잘 알려진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66)가 1857년에 제작한 <동여도(東輿圖)>에 나타납니다. 계화면 창북리의 서쪽 정도에 표기되어 있는데, 군산대학교 사학과 곽장근 교수는 가야포의 위치를 하서면 청호리의 청호저수지로 추정합니다. 즉 가야포는 1968년에 축조되어 수몰된 청호저수지 자리에 있었다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 어떠한 흔적도 찾아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가야포와 죽막동 위치도(동여도,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 부안 죽막동 2. 가야포 3. 부안 창북리 4. 정읍 운학리 5. 정읍 지사리

그런데 부안에 웬 가야포일까요? 가야포의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일대에서부터 전라남북도 동부 산악지대 일대에 걸쳐 넓게 형성되었던 가야국에서 따온 말입니다. 가야는 문자 기록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남기지 않은 소국들의 연맹체이지만 생산력이나 기술 수준이 대단히 높아 그에 바탕하여 풍부한 문화를 향유하였고, 신라, 백제, 고구려와 대적하며 우리가 국사 상식으로 배워온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를 형성해왔습니다. 홍익대 역사교육과의 김태식 교수는 저서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2002)에서 가야를 포함해 사국체제로 설명해야 한국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령-함양-장수/임실-정읍, 그리고 부안

호남 동부지역 지형도.
그렇다면 그야말로 가야와 동떨어진 부안에 웬 가야포일까요? 통일신라 때 당나라에 있던 신라인들의 집단거류지를 신라방이라고 했습니다만, 아마도 그런 류의 기능을 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렇다면 왜 부안에 가야가? 하여튼 남겨진 기록이 없다보니 온갖 궁금증이 생기고 온갖 상상이 다 됩니다. 그러나 진척된 가야사 연구의 성과로 추적해볼 때, 부안의 가야포는 가야국에 딸린 포구마을로 형성되었으리라 추정됩니다.

가야 문화, 특히 후기 가야사(5세기초~562)를 주도한 고령 대가야의 토기 등 유적 및 유물은 전라도의 동부지역인 장수, 진안, 임실, 남원, 곡성 등지에서 무더기로 발굴되었습니다.
나는 부안의 가야문화 흔적과 고령의 대가야문화를 연결시켜보고자 3월 28일과 4월 23-24일 두 차례에 걸쳐 고령을 답사하였습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했던 답사였지만, 4월 24일 되돌아오는 코스에서는 나로서는 의미있는 발견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령에서 거창으로 이동할 때 시외버스를 이용하였고, 다시 거창에서 전주로 운행하는 시외버스로 갈아탔습니다. 버스는 거창을 출발해 함양군의 안의면-서상면을 경유하고 육십령고개를 넘어 장수군의 장계면으로 이어갔습니다.

여기서 ‘의미있는 발견’이란 거창-장수(장계)-전주의 대중교통이 활발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1시간 정도의 간격을 두면서 버스가 운행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30분 정도의 간격이었다는 것이 버스기사의 설명이었습니다. 백두대간의 육십령을 넘어 경상도권과 전라도권의 왕래가 예로부터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계의 주민도 함양으로 장보러 다녔다고 증언합니다. 하나의 생활문화권으로 이어졌을 법 합니다.

고령의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

정읍 영원면의 지사리 고분군.

이 왕래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알 수는 없겠습니다만, 어쩌면 적어도 ‘사국시대’ 때부터였을지도 모릅니다. 함양에서 육십령을 넘어 맞닿은 장수군의 장계면에는 삼봉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전북대박물관이나 군산대박물관의 발굴조사 성과로 보면, 400년대 후반 대가야가 백두대간 서쪽으로 진출한 흔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대는 “500년대 초반에,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대가야와 서부경남으로 진출하려는 백제가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던 ‘기문’(己汶)으로 꼽히는 지역”(<매일신문> 특별취재팀,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 2004)입니다. 함양과 남원을 연결해주는 복성이재 등지도 가야세력의 서진 경로였을거로 보아 이 일대의 백두대간은 경상도권과 전라도권을 분리하는 지형적 장벽이라기보다 교통로로 이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가야세력의 장수, 남원, 임실 등지의 진출은 부안에서 가야포가 형성되도록 한 배경이었을 듯합니다. 곽장근 교수는 2007년에 발표한 글에서 “금남호남정맥과 백두대간의 고갯길을 넘는 여러 갈래의 내륙 교통로가 임실읍에서 하나로 합쳐져 호남정맥의 가는정이를 넘게 되면 가야포까지 손쉽게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세력이 내륙교통로를 이용하여 서해의 연안항로까지 도달하는데 거리상으로 최단거리를 이룬다. 대가야 등 경남 북부권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가야세력이 이 교통로를 주로 이용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야세력과의 긴밀한 교류관계로 추정되는 정읍시 영원면의 지사리와 운학리 고분군, 계화도의 유물들입니다.

대가야-중국 해상교통로(매일신문 특별취재팀).

대가야 세력, 죽막동에서 제사를

이렇게 보면 부안에 가야포가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곽장근 교수는 가야포―계화―동진강 하구로 펼쳐지는 바다는 매혹적인 장소라면서 당시로서도 경제적인 가치가 충분히 컸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또 하나는 가야포에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격포의 죽막동입니다. 죽막동은 원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제사를 지내던 수성당이 있는 마을입니다. 수성당 일대에서는 1991년 물결무늬가 선명한 대형 토기와 제사에 사용한 원통형 그릇받침, 쇠창, 말 안짱다리, 말띠드리개, 구리 및 쇠 방울 등 대가야 계통의 유물들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대가야 세력이 죽막동을 이용했다는 흔적입니다.

죽막동에서 출토된 대가야의 원통형 그릇 받침.
대가야세력이 고령에서 함양―섬진강―하동―남해를 거쳐 죽막동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함양―장수/남원―임실을 거쳐 가야포/죽막동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대가야는 일본과도 교통이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남제(479∼502)와도 교류를 가졌습니다. <매일신문> 특별취재팀은 “수성당을 배경으로 한 ‘죽막동 제사유적’은 대가야와 왜, 백제가 중국과의 교통루트 확보 및 교역을 위해 바닷길을 뚫는 과정에서 제를 올리며 항해의 안전을 빌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막동과 가야포는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르게 설정된 각각의 장소들일까요? 이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막동은 유물이라도 발견되었지만 가야포는 인근 계화면 창북리에 6기의 말무덤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1500년이 흘러온 긴 역사의 공백에서 단 하나의 점으로 튀어나온 게 바로 김정호의 <동여도> 가야포입니다. 1857년까지도 현존해 있었으니 김정희가 지도상에 표시를 하였을 겁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가야포 마을의 전부입니다.

붕어의 씨를 말리며 생태를 교란시킨다는 외래어종 배스에 기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나는 청호저수지를 바라보며, 창창한 바다가 열리는 가야포 마을의 그 이질적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가야 사람들은 가야포에서 무엇을 했을까, 질문해봅니다.

글·사진=고길섶(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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