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학생백일장 사생대회를 시작으로 매창문화제가 펼쳐집니다. 부안문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매창을 기리는 뜻으로 매창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구성한 글을 4회 연속으로 싣습니다. <편집자 드림>



외로움이 한숨되어 병되어

배꽃이었다. 이화(梨花). 봄바람에 흩날리듯 때로는 흩뿌리는 봄비처럼 어지러이 휘날리고 있었다. 멀리 선화당(宣花堂, 부안관아)과 기방(妓房) 사이의 오롯한 길이 보였다.

부안 기방(妓房)을 물러나온 이래 선은동 마을에 기거한 지도 어언 십여년이 되어간다. 매창(梅窓)은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지난 겨우내내 병중에 있었다. 기나긴 동지섣달을 기침으로 밤을 세웠고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기다림 속에서 매창의 몸과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무술년(1610년) 봄은 왔다. 그 봄은 유난히 꽃잔치가 벌어진 봄이었다. 초봄까지 매화가 그 단정하고 절개스러움을 창밖에 보이더니 도화(桃花)천지로 이어가고 이화(梨花)세상이었다.

마루 위의 설렁줄에 기대고 섰던 매창은 행랑채 어멈의 부축을 받아 마당에 내려섰다. 그리고 행랑어멈은 언제나처럼 안방에 있던 거문고를 가져 왔다. 이미 그녀는 하얀 명주치마저고리에 단정한 머리단장으로 마당 평상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 속에 봄바람이 제법 살랑거렸다. 그 꽃바람 속에 지나간 세월들이 겹쳐져 왔다.

짧지 않은 38년의 세월 속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울고 웃고 뭇사내들의 야망과 욕망 그 파도 속에서 살아왔다. 아니다. 뭇사내들이 매창을 찾아왔다가 매창을 떠나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매창의 여윈 손이 술대와 함께 미끄러지 듯이 명주 줄 위를 노닐기 시작한다. 거문고 소리와 청아한 매창의 노래소리가 휘날리는 배꽃들 사이로 구름처럼 피어나가고 그 사이에 아버지 이탕종(李湯從)이 보였다. 그녀가 첫 정조를 바쳤고 머리를 얹어주었던 부안사또 서우관(徐雨觀)의 모습도 보였다. 아아 꿈에도 잊지 못할 내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도 보인다. 그리고 김제군수 이귀(李貴)의 모습도 보이고, 그렇게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던 대문장가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모습도 겹쳐온다. 매창은 지그시 눈을 감고 거문고를 쉬임없이 튀겨나간다. 현금(玄琴) - 일생을 같이 해온 매창의 거문고,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일컬어지는 깊고 장중한 소리,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매창의 기억엔 어머니는 없다. 매창을 낳은 후 얼마 안 되어 산욕열(産褥熱)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이탕종은 부안관아의 현리(縣吏)였다. 예방(禮房)이었던가! 이탕종은 돌림병으로 전처소생들을 한꺼번에 잃고 나이 오십이 되어 부안관아의 노기(老妓)를 소실로 삼아 매창을 얻었다.

노년에 얻은 고명딸을 이탕종은 너무도 사랑했다. 관직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서당을 전전하며 글동냥을 하면서 어린 딸을 남장(男裝)시켜 학동들과 함께 수학케했다. 매창이 훗날 기적(妓籍)에 오르면서 춤과 노래는 행수기생(行首妓生)에게서 전수받았지만 글과 거문고는 그 아버지 이탕종에게서 배웠다. 이탕종은 거문고의 명인이었다. 명인은 명인을 낳는다고 했던가.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 이었다. 열 살 이전에 이미 매창의 글은 인근에 소문이 났고 거문고 또한 아버지를 능가했다.

매창은 계유년(1573년)에 태어났다. 그녀가 이 땅에 오던 날 금조(金鳥, 노란새) 한 마리가 부안현 관아에 날아들었고 , 그 금조를 따라 뭇새들이 날아와 금새 부안관아 주산인 상소산(성황산)을 뒤덮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계생(癸生), 계량(桂娘)이라 했고, 이름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이라 했다.

그의 아버지 이탕종은 그녀 나이 열둘에 매창을 남겨두고 아쉬운 생의 발길을 돌리게 된다. 천애고아가 된 매창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삶을 부안기방 기적에 맡긴 것이다. 그리고 어언 삼십여년 이제 삶의 마지막 부분에 서있는 것이다.

구슬같은 배꽃 피고 두견우는 밤
꿈에 가득 달빛 내려 다시 쓸쓸해
꿈에나 만나려도 잠조차 오지 않고
매창가에 기대니 새벽닭 우는 소리
瓊花梨花杜宇啼
滿庭蟾影更悽悽
相思欲夢還無寐
起倚梅窓聽五鷄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 몸이
굶고떨며 사십년 길기고 하지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사는가
가슴 서글퍼 하루도 안 운적 없네
空閨養拙病餘身
長任飢寒四十春
借問人生能幾許
胸懷無日不沾巾

매창의 거문고 소리는 더욱더 구슬퍼갔고 노래소리는 청아했으나 그 슬픔이 가슴을 에이었다. 머리를 얹어주었지만 부실로도 인정 안 해준 부안군수 서우관이었지만 그래도 지조를 지키고 싶었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 청초한 매창을 강압하여 맺은 첫 인연이었지만 서 진사는 매창을 돌보지도 지켜주지도 못했다. 그는 한양으로 가서 소식조차 없었다. 그러니 어쩌랴. 매창은 머리얹은 기생으론 주인없는 신세가 돼 기방을 나올 수 밖에 없었고, 기댈 곳 없는 매창은 뭇사내들의 유희놀이에 곤난한 생활고를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평생에 밥얻어 먹는 일일랑 배우지 않고
창가의 달빛 젖은 매화만을 사랑했는데
세상사람 내 마음을 못 알아주고
오가는 길손마다 집적거리네
平生恥學食東家
獨愛寒梅映月斜
時人不識幽閑意
指點行人枉自多

매창은 기생신세인 자신을 평생 부끄럽게 생각하였고 세상 어지러움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달빛에 비친 매화나무 가지에 비길 정도로 절개와 지조를 지키는 여인이고 싶었다. 이는 평생의 마지막 연인인 촌은 유희경을 만나면서 그의 절개는 빛이 났지만 짧은 만남 긴 이별 속에서 매창에게는 이별의 아픔, 그리움, 고독이 뒤섞여 그의 내면세계를 비추는 시심도 비련 속에 깊어지게 된다.

촌은 유희경은 부안사또의 관객(官客, 친구)이었다. 그는 천민 출신이었으나 당대 유명한 위항(委巷)시인으로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시회인 풍월향도(風月香徒)를 이끌었다.

만남 그리고 사랑-짧은 만남 긴 이별의 서곡이여

매창은 서우관으로부터 버림받고 설움과 시름 속에 지내던 어느 봄날 사또의 향연에 현신(現身)하는 자리에서 전부터 익히 들었던 촌은 유희경을 만나게 된다.

매창은 대문장가를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선생은 한양에서 위항시인으로 유명한 두 분의 시인 가운데 백대붕입니까? 유희경입니까?”라고 물었다. 촌은 유희경, 유(柳)자가 수놓인 도포자락을 들어 자신을 밝히자 매창, 정중하게 큰절을 올리면서 반가움의 수인사를 나눈다. 촌은 유희경, 일찌기 부안기생 이매창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녀가 자기를 알아보니 기쁨으로 적이 놀라면서 매창과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매창을 보자 첫눈에 반한 유희경은 시로써 매창의 마음을 흔들어본다.

남국의 아가씨 이름은 계랑
시와 노래로 서울까지 울렸도다
오늘 그대를 직접 대하고 보니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듯 하구나
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
今日相看眞面目
却疑神女下三淸

그야말로 매창과 유희경, 백락일고(伯樂一顧)라고 했던가, 명마(名馬)와 백락(伯樂)의 상봉이었다. 오십평생 여색을 멀리했던 유희경, 실연의 배신감에 아파하던 매창! 거문고의 운율은 절정에 달해가고 있었다.

나에게 신기로운 선약이 있어
찡그린 얼굴도 고쳐줄 수 있으니
금낭 속에 간직한 귀한 그 약을
정다운 그대에게 아낌없이 주리다
我有一仙藥
能醫玉頰嚬
深藏錦囊裡
欲與有情人

유희경의 음율에 매창의 거문고 차례다.

내게는 옛날의 거문고 있어
한번 타면 온갖 시름이 다 생긴다오
세상사람 이 곡을 못 알아주니
그 님의 피리에나 맞추어보리
我有古奏箏
一彈百感生
世無知此曲
遙和??山笙

사랑과 유희, 정신과 몸이 하나되는 절정의 쾌락음이 거문고의 빠른 음율을 타고 구름 위를 나르고 있다. 매창은 이번엔 대담하게도 솔직한 운우지정을 노래하고 있다.

비바람에 울리기를 몇 해였는고
몸에 지닌 짤막한 거문고 하나
외로운 곡조는 타지를 말자
임과 함께 백두음을 타 보고 지고
幾歲鳴風雨
今來一短琴
莫彈孤鸞曲
終作白頭吟

농익은 여인의 요염한 향취를 치마폭에 살며시 가리고, 한나라 여류시인 탁문군(卓文君)의 백두음(白頭吟) 고사를 들어 촌은 유희경을 유혹한다. 매창의 얼굴은 붉어지고 이에 화답하는 유희경 또한 노골적이고도 선정적인 손놀림으로 희롱이 거칠어져 간다. 아, 움켜진 저고리 옷고름 자락이 어쩌다 그만 뜯겨지는 구나.

취하신 내 님, 이 마음 아시나요(贈醉客)

취하신 우리님 날 사랑하시다가
움켜진 비단 옷자락 그만 뜯겨져 나갔구료
그깐 옷자락 하나 아깝지 않사오나
님의 온정 잃을까 마음이 아프네요
醉客執羅衫
羅衫隨手裂
不惜一羅衫
但恐恩情絶

영혼과 육신의 일체음-그 환락의 밤은 길었지만 짧은 밤이었다. 매창의 관용과 너른 마음씨, 사내를 배려하는 깊고도 아름다운 마음씨에, 그 여유롭고 깊은 정(情)에 유희경의 사랑은 더해만 갔다. 유희경이 있어 매창이 있고, 매창이 있어 유희경이 있었다.

푸른 버들 붉은 꽃 피는 봄철은 순간인 것을
고운 얼굴 주름지면 되돌리기 어려워라
선녀인들 홀로 잠드는 쓸쓸함을 어이 견디리
무산 운우의 정을 자주 나누세그려.
柳花紅艶暫時春
撻髓難醫玉頰嚬
神女不堪孤枕冷
巫山雲雨下來頻

사랑도 이 정도 되면 예술이다. 사랑에 옛사랑과 신세대사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사랑은 그 진정성에 있어 높고 낮음이 없다.

▶다음 호에 이어짐

글=김경민(본보 상임이사)
삽화=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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