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밤을 좋아하는 식구들에게 맛있는 밤밥을 해줄 생각으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밤을 꺼냈다.

먼저 눈에 띄는 큰 것부터 손에 잡아 칼집을 넣으니 ‘푹’하고 맥없이 칼이 깊히 박힌다. 약간 김이 새지만 “밤이 보관이 수월하지 않지”하고 혼잣말을 하며 다시 다른 것을 집어 손가락으로 누르니 물렁하고 허벅한 느낌이다. 어이 뭐야 이거!! 하며 이리저리 뒤적거려보니 대부분 곰팡이가 나거나 색깔이 선명치가 않다.

아차! 싶다. 해마다 청설모나 다람쥐가 밤이 익어 송이가 벌어지기가 무섭게 홀랑 집어가 농장 여기저기 흘리고 간 밤송이가 널브러져있고, 밤벌레들은 밤 한알에도 몇마리씩 자리를 틀고 들어앉아 하얀가루똥만 내놓기에 도무지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10월 가을걷이가 한창인 때에 올해는 밤 좀 먹어보자 하고 남편은 절반 남짓 익은 밤들을 꼬박 하루품을 들여서 죄다 따서 일삼아 까두었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제대로 여문 밤은 벌레가 들어있거나 좀 마른듯해도 밤인데, 덜 여문 밤을 말려놓은 것은 껍질도 얇고 속은 완전히 폭삭 썩었다.

콩심을 때는 벌레 한알, 새 한알, 그리고 사람몫으로 한알 이렇게 세 알을 심었다는 옛말이 있다. 자연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을 두루 헤아리며 또한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농사를 지어 먹었다는 것일 게다.

그런 섭리일까. 다람쥐와 청설모, 밤벌레를 경쟁대상으로 여겨 채 여물기도 전에 힘들여 잘 까지지 않는 밤을 애써 까서 보관했더니 사람조차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요즘처럼 제철이 따로 없이 온갖 과일이 생산되고 열대과일이 수입되어 싸게 아무때나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니 밤 몇알에 그리 목숨걸 일도 아니지만, 제철과일로 밤만큼 좋은 것도 없다. 대부분의 과일은 찬 성질이라 많이 먹으면 오히려 배가 차고 설사도 나고 몸에 해롭지만 밤은 따뜻한 성질이다.

마트나 장에 가면 벌써 딸기나 방울토마토가 나와 있다. 오이, 애호박, 풋고추, 파프리카도 있다. 모두 화석연료를 사용해 비닐하우스에다 온도를 높여주어 겨우겨우 나오는 것들이다.

이런 채소나 과일들은 한여름의 뜨거운 기운과 풍부한 빗물로 쑥쑥 자라서 더운 몸을 식혀주는 찬 음식들인데 한겨울에 이런걸 먹으면 몸이 차가워지고 감기를 달고 살게 된다. 셋째아이를 가져 입덧이 심할 때 철이른 딸기와 오이를 사다먹고 온식구가 감기로 며칠간 고생을 한 기억이 난다. 득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 깊히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해마다 농장 여기저기에 과일나무들을 심어둔다. “쟤가 무슨나무더라?”하고 잊을만 하면 “나 여기 살아있어요”하고 꽃망울을 터뜨리더니 몇 개의 열매를 매달아 아이들에게 탄성을 지르게 한다.

올해도 종묘사에 과일나무를 여러 가지 주문했다. 커가는 아이들에게 이런 군입거리를 잊지않고 마련하는 것도 부모노릇 중에 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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