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갓 시집 온 며느리 앞에서 해묵은 옷장을 정리하시던 시어머님!

버릴 옷을 시원시원하게 골라내다가 들었다 놨다 옷가지 하나를 놓고 유난히 망설이신다.
그것은 버리기엔 꽤 괜찮아 보이는 까만색 비로도 코트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나는 “어머님! 이 옷도 버려요? 이렇게 고급스런 옷을요?”하고 여쭸다.

“저승간 사람 옷 하도 아까워서 20년간 장속에 놔뒀는데 이젠 태워야겠다.” 하시면서 한쪽으로 제쳐놓는다. “네 시아버지 젊었을 땐 참 멋졌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자상하고…. 그 인물 땜에 반해서 내가 시집왔단다. 저 옷은 네 시아버지께서 살아생전 직장 생활할 때 입었던 옷인데 아주 비싸게 주고 양복점에서 맞췄다. 입히고 싶은 사람도 없지만 하도 좋은 옷이라 아까워서 놔뒀는데 이젠 치워야겠다.”

그것은 그동안 사진으로만 뵙던 시아버님께서 생전에 입으셨던 외투였다. 훤칠한 모습만큼이나 곱고 선하게 생긴 까만색 비로도 코트를 나는 서슴없이 챙기며 “이렇게 귀한 옷을 왜 태우세요? 이거 저 주세요. 품이랑 기장 고쳐서 제가 입을래요.”라고 보챘다.

그랬더니 “아이고, 너는 새파랗게 젊디젊은 애가 취미도 참 이상하다. 요즘 세련되고 이쁜 옷이 가는 곳 마다 지천인데 저세상 간지 20년이나 된 영감 옷을 왜 입겠다는 거여” 라며 서로 뺏고 빼앗기는 실랑이를 했다. 시어머님이 그렇게 한사코 말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강산을 두 번 이나 바꾸며 겨울을 보냈다.

한겨울 말고는 늘 한자리에서 까맣게 서있기를 25년. 내게도 어머님과 장롱 정리를 하던 그날처럼 옷가지를 정리하다 유독 길게 머무는 시선에서, 이제는 가슴 싸하게 아쉬운 인연이 되었지만 그래도 소중한 곳에 늘 자상하게 걸려있는 그림 하나! 어느 겨울이던 간에 콧날이 날아갈듯 한 매서운 추위도 따뜻하게 녹여주는 그런 아버님과의 교감에서 둥지같은 채취에 흠뻑 젖어본다.

세월이 놓고 간 것으로부터 쉽게 정 떼지 못하는 나에게 그 코트는 아무리 봐도 명품 중의 명품이다.

아주 섬세한 바느질에다 선명하게 적혀있는 ‘청주 도미도 양복점 전화 1248번’ 이 늙은 글자! 고운 인연 고스란히 안고 내게 와서 25년 물질만능주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자꾸만 퇴색되어가는 가슴을 가끔씩 환기시켜주는 향수 같은 그림 하나!

45년이나 된 까만색 비로도 코트를 어루만지며 오늘도 고운 인연을 예쁘게 포장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어느 기관의 슬로건이 문득 생각난다. 진정한 사람이 그리워지는걸 보니 내게도 스산한 가을이 왔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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