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붉게 달궈지는 내마음 가만히 서랍을 연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한가로움에서 책장정리를 하다 발견한 낡은 일기장 세권이 손에 잡힌다.

서둘러 정리정돈을 끝내고 책상 앞에서 제가 써놓고도 재밌는지 연신 씨익씨익 웃어가며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한 10여년쯤 된 일기장일까. 소박하지만 군데군데 사람사는 냄새와 그윽한 행복이 묻어있다.

어느 한 날은 이런 얘기다.

“3개월 동안 나는 허송세월 보낸 것 같다. 야! 조금씩이라도 너를 반들거리게 키우면서 살지 그랬어?”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꾸짖는 기특하고 이쁜 말이다. 그리고 저녁나절엔 남편이 보고팠는지, 아님 배가 출출했는지, ‘우동 사줄게 나와’하는 남편 목소리가 기다려진단다. 애교스런 저 바람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번진다. 지금이라고 착각한 건지 무지 행복한가보다.

그랬었는데! 웃는 날만 있는 게 아닌가보다.

어느날은 슈퍼마켓을 했을 땐가, 손님 중 경기도 모아파트 나동 310호 아줌마 독살맞고 짜증스런 말투로 사람 환장하게 만든다. “계산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장사를 한답시고 그 큰 슈퍼에 있냐며 똑바로 하란다.” 그러면서 두유는 3팩 모자라고 거스름돈은 350원이 모자란다며 수화기를 표독스럽게 놓는다. 분명 십원짜리까지 잘 챙겨 보냈는데. 두유는 새로운 박스를 헐어 작은 1박스를 챙겨 보냈는데 어찌 숫자가 모자른다는 건지? 참내 옆에 듣고 있던 아들은 “그 아줌마 상습이라며 가지 않겠다”고 투덜거린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 뭔가 착오가 있었나보다며 모자란 것 금방 보내겠다며 연거푸 죄송하다 했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엄마가 안돼 보였는지 금고에서 잔돈과 두유팩을 들고 터벅터벅 계단 오르는 아들 뒷모습이 보인다.

뭐 이런 얘기들로 빼곡히 때론 속상해서 섭섭하고 때론 즐거워서 행복하고 알록달록한 낡은 일기장이 나를 꽉 잡고 놔주지 않는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러고 보니 문득 군 제대한 아들이 보고 싶어진다. 오늘도 습관처럼 서랍을 연다. 갓난아기 그대로 서랍 속에 누워있는 배냇저고리는 꾹꾹 차오른 내 그리움을 대신한다.

24년전 백일 안팎으로 입었던 그 저고리를 간혹 가다 꺼내들고 눈맞추다보면 어느새 젖내로 누렇게 물든 융은 내 품속을 파고든다. 볼 때마다 뽀얗게 삶아놓길 벌써 여러 해! 우리아들 냄새로 범벅인 나의 소장품 1호다. 뽀얗게 삶아서 잘 개어놓아도 다시 누래져있는 배냇저고리를 보면서 엄마의 그리움은 해가 거듭해도 지울 수가 없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애틋하기도 하고.

오늘같이 파리한 날이면 붉게붉게 달궈지는 내마음 가만히 서랍을 연다. 또 누렇게 익어있을 배냇저고리에 내 그리움 한껏 닦아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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